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적 Feb 15. 2023

1인 워크숍 | 비건 식당에서 원데이 클래스


부산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여러 비건 식당을 후보에 올려놓고 고민했다. 그중 하나였던 '한민이의 마크로비오틱'은 처음에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비건'의 김한민 작가님이 운영하는 곳인 줄로 오해했다. 성과 이름이 모두 같은 동명이인에 비건이라는 것까지 공통점이 겹치니 혹시 그분일까 하고 심쿵했다. 내가 예상한 그 김한민 작가님은 아니었지만, 결국 내게 이 이름은 멋진 행보를 보이는 사람만 가져가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말았다.

미리 메뉴를 찾아본 후 간단히 점심으로 '튀김우동세트'를 먹어야겠다고 정했다. 특별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변동적인 오픈 시간을 확인하려 식당의 인스타 계정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원데이 클래스 자리가 하나 남았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맛짐 탐방만 할 생각이었지 날짜에 맞춰 비건 요리를 배워볼 생각은 못 했는데 갑자기 반응하는 나의 심장. 원데이 클래스를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민이라는 걸 한다는 건 열에 아홉은 원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빠른 예약과 입금으로 새로운 일정이 생겼다. 여행의 마지막 날, 숙소에서 체크아웃하고 캐리어를 끌고 찾아온 이곳.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하나둘씩 보이는 조용한 거리였다. 추운 평일 아침이라 더 고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마크로비오틱(Macrobiotic)이라는 귀여운 로고와 유리창에 비친 한 명의 여행자. 어떤 곳일지, 어떤 걸 배울지 문을 열기 전 설레는 기분으로 가득했던 나의 모습이다.




마크로비오틱이라는 생소했던 단어는 건강한 식생활법을 말한다.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먹는다는 의미에서 '음양오행'의 법칙을 따르는 데 계절에 따라 식재료의 음과 양을 고려하며 제철 채소를 먹는 것이라고 한다. 동물성 식재료를 배제하는 비건식 안에서 마크로비오틱은 한 발 더 나아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이라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뭔가 동네 마실처럼 셰프님과 수강생 한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누군가에게 익숙한 일상에 낯설게 발을 들인 여행자는 약간은 쭈뼛하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강생은 나 포함 총 세 명. 요리를 만들면서 배우는 방식인 줄 알았는데, 셰프님의 요리를 보면서 레시피를 공부하고 식사를 하는 과정이었다. 요리는 총 세 가지로 갓 절임과 비건 밀푀유 그리고 비건 카레 수프였다. 음식의 재료부터 과정까지 디테일한 설명과 더불어 앞서 말한 음양오행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음과 양은 식재료의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을 말한다. 겨울에는 몸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겨울 채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당연히 제철 채소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제철이 여름인 오이를 먹는 것이 비건식에서는 어긋나지 않지만, 마크로비오틱에서는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번의 수업으로 마크로비오틱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식물식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사이드 메뉴가 먼저 완성됐다. 비건 밀푀유에 찍어 먹을 간장 소스와 땅콩 소스 그리고 갓절임. 땅콩 소스는 100% 땅콩잼을 베이스로 만든 것인데 다진 마늘이 들어가 너무 개운하고 상큼한 맛이었다. 샤브샤브 먹을 때 먹었던 그 둔탁한 땅콩 소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소한데 느끼하지 않은, 알싸하면서도 부드러운 풍미 가득한 맛.

여기에 갓절임은 또 어떻고. 하루 전날 절여놓은 갓절임은 딱 알맞게 익어 아삭하고 새콤하고 그러면서도 너무 시지 않게 담백했다. 이건 조금씩 싸주셔서 집에 고이 가져와 가족들과 며칠을 먹었다.




메인 요리 등장. 야채 구이와 함께 완성된 비건 카레 수프는 색이 보여주듯 향이 강한 일반적인 카레와는 결이 달랐다. 슴슴한데 계속 쭉쭉 들어가는 그런 맛이었다. 소화력이 약한 내가 허겁지겁 먹어도 속에 아무런 부담이 없고 식욕을 돋우는 맛이었다. 게다가 비주얼도 너무나 내 취향.




다음은 비건 밀푀유. 배추와 버섯, 당면이 들어간 이 밀푀유는 정말 달큰했다. 달큰의 농도가 굉장히 진했는데 이건 인위적인 단 맛이 아니라 배추의 단 맛이었다. 이렇게까지 달큰하다고?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간이 세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충분히 맛의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음식만 즐거웠던 건 아니다. 초면인 사람들과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조심스럽게 던지며 나누는 대화는 풋풋하고 유쾌했다. 비건과 육아에 관한 이야기는 툭 던지기만 해도 멈출 수 없는 화수분이다. 나 이렇게 낯 안 가리는 I였나.



뿌듯하게도 싹싹 비웠다. 중간에 다른 수강생분이 밥을 조금 달라고 하신 덕에 밥까지 비벼 먹었다. 이런 말끔한 만족감은 정말 흔치 않은데, 건강한 비건식에 유난히 월등한 소화력을 보이는 내 혀와 목구멍과 위다.



마무리는 비건 초콜릿으로 했는데 적당히 달고 좋게 씁쓸한 생초콜릿이었다. 발렌타인데이엔 비건 초콜릿 수업을 한다는데 올라가야 하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원데이 클래스는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지막 날 특별한 일정이 없어 해변 열차를 탈까 고민했었는데 탔으면 정말 밋밋할 뻔했다. 나의 부산 1인 워크숍에 화룡점정이 되어주었던 특별한 경험이었고 첫 비건 요리 수업이기도 했다. 

비건 실천의 어려움은 요리를 싫어하던 내가 스스로 내 밥까지 다 차려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변엔 비건 식당이 잘 없고 국물과 양념의 재료를 알 수 없는 채식 메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오로지 채식이라서 고르는 메뉴이므로 나의 기호와 멀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업을 듣고 난 후 얼마간은 비건 요리에 대한 흥미와 텐션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채수를 냉침 해서 쓰는 것에 빠져 매일 커다란 물병에 다시마와 무말랭이와 건표고버섯을 꽉꽉 채우기도 했다. 이런 수업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내 안에 좋은 성과를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울에서는 왜 이런 클래스를 들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여행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이젠 해봐야지.



이전 10화 1인 워크숍 | 재생 공간과 중고 서점, F1963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