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 하고도 셋이 되었다. 불혹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보다 더한 흔들림이 있을까 싶게 마흔 앓이를 요란하게 했다. 이대로 이 흔들림을 흘려보냈다가는 오십에도 육십에도 주책맞게 자아를 찾겠다고 흔들릴게 분명했다. 이번에야 말로 이 흔들림의 뿌랭이를 뽑아보리라! 야심 차게 마음을 먹었지만 사실 흔들리지 않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평생 글을 쓰며 돈을 벌어왔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머리를 쓰는 일에서는 주목을 받아왔지만, 몸을 쓰는 일에서는 다른 이유로 주목을 받았다. 몸은 항상 느렸고, 행동은 늘 둔했다.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머리만을 써온 탓에 나의 머리는 남들보다 훨씬 더 날렵하고 예민해졌다. 고민을 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걱정을 쌓는 건 양과 속도면에서 국가대표급이었다. 남들은 감히 찾지 못하는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찾아내어 고민했고, 상상도 못 할 다양한 생각들로 불안을 창조해 냈다.
예민한 성격과 수많은 생각들이 밥벌이로 글을 쓰는 일에는 큰 도움이 되었으나, 삶에서는 불면과 피곤의 이유가 됐다. 상상이 만들어낸 미래는 늘 불안했고, 나는 항상 무엇을 하고 있음에도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늘 머리가 아프고 피곤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 생각하던 찰나, 같은 이유로 방황하는 그녀를 알아봤다.
그녀는 아친엄, 아들친구엄마이다. 윗집 아랫집 한 동네에 살며 아들들의 문제집 걱정, 학원 정보를 나누다
자식의 행복과 안위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서로를 알아봤다. 나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서 불투명한 미래를 이유로, 그녀는 육아로 잠시 멈춘 자아에 대한 고민으로 한숨이 늘었다. 우리 이대로 현실에 안주하며 늙어갈 수 있을까? 우리의 결론은 그럴 리가 있나였다. 나의 성장을 멈춘 채 자식의 성장만을 바라보고 살기에 우리는 출산 이전 너무나 나에게 집중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나를 위해 살아왔다.
우리의 방황은 결론이 없었다. 삼한사온마냥 며칠은 괜찮았다 며칠은 마음이 불안으로 휘몰아쳤다.
무엇을 할지 모른다면 오늘만 살아보자. 오늘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자 생각했다. 오늘만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자 답은 매우 심플했다. 일용직! 대신 일용직에서도 조건은 있었다.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무조건 움직일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것! 우리에겐 완벽한 익명의 공간에서 생각을 멈추고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도피처가 필요했다. 그렇게 우리가 선택한 곳은 바로 물류센터였다.
(이미지 출처 l 픽사베이)
일용직의 메카, 우리가 선택한 물류센터의 매력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나의 어제를 묻지 않는다. 이제는 경력 18년 차 몇 장이 넘치도록 쓸 수 있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따위 필요 없었다. 전화번호와 이름, 나이 하나면 지원이 가능한 곳! 내가 무슨 일을 해왔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평가받지 않았다. 과거의 삶을 돌아보고, 평가하고, 괴로워하는 일에 익숙한 우리에게 오직 오늘부터 시작하여 오늘 마무리할 수 있는 하루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심플하고, 부담 없는 일이었다.
둘째, 계속 움직여 생각을 막는다. thinking이 많아 acting이 안 되는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머리를 멈추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생각이 새어 나올 틈 없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나의 에너지의 온도를 높이는 일! 그것이 필요했다. 앞에서 밝혔듯 누구보다 둔한 몸을 가졌지만 모든 공고에서 "신체 건강한"의 조건만 요구했고, 충분히 부합할 만한 건강한 몸을 가졌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셋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물류센터는 정말이지 '대화'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마치 찰리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의 한 장면처럼 하나의 부품이 되어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단순함! 복잡하다 못해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나의 상황에 꼭 필요한 덕목이었다.
넷째,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인생이었다. 새로운 생각을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이 필요했고, 물류센터는 나의 일터로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고, 대학 때 알바로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곳이기에 지금의 필요에 딱 맞는 곳이었다. 학생 때는 범생이자 우등생으로, 직업인이 되어서는 노트북 자판만을 두들기던 내게 상상도 못 해봤을 환경. 그곳에 나를 던져 나의 한계와 용기를 시험하고 싶은 기분이었고, 물류센터는 그런 조건들에 딱 맞는 곳이었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누군가에게는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힘들고, 지난한 노동의 현장.
이대로 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평안한 인생을 살고 있다가, 자아를 찾겠다고 무턱대고 그곳을 찾아간 우리가 어찌 보면 배부르고 한심해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에서 벗어나 가슴 뛰고 뜨겁던 나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간절함.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던 나의 그 용기를 다시 찾고 싶었다. 생각을 멈추고 나 스스로 만들어 낸 몸의 에너지 속에서 다시 새로운 것들을 해낼 수 있는 용기를 찾고 싶었다.
한 달여간 우리가 찾아갔던 많은 일용직의 현장은 단 한 곳도 똑같은 곳이 없이 다른 깨달음과 웃음, 그리고 긴 생각들을 남겼다. 도저히 적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수많은 추억들과 기억들. 두고두고 아이에게 얘기해 주고, 살아가는 순간순간 꺼내보고 싶은 감정들. 돌아오는 길 마음 가득 채워지는 울컥하는 정서들.
나는 이 것들을 잊지 않게 기록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어졌다.
하루살이 노동에서 발견한 나의 또 다른 모습들과 가능성들을 기록하고, 우리처럼 마흔의 언저리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또 생각이 많아 제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고민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루하루 쌓은 노동의 기록으로 용기를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