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정신이 육체보다 고귀하고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역경도 강인한 정신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고, 대부분 그렇게 이겨내며 살아왔다 자부했다. 1월 1일이 되면 수첩 가득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써내려갔고, 무언가 잘 안풀릴 땐 나의 나약함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찾아보기 일수였다. 그러나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다. 바로 뇌도 몸의 일부라는 것! 결국 생각은 몸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쉽게 흥분하거나 과열이 되는 인간이 아니다. 10대부터 늘 나는 30대가 잘 어울릴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을 만큼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이었다. 마음에는 뜨거운 열정덩어리를 안고 살았지만 잘 드러내는 법이 없었고, 쉽게 흥분하는 일은 더 없었다. 오래 생각하고 며칠을 마음 속에서만 태웠고, 절대 식지 않을거라 생각이 들면 겨우겨우 몸을 움직이고는 했다. 연애도 그랬고, 일도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기력하고 피곤했다. 나의 마음에 왜 희망이 차오르지 않는지 고민하다 어느 순간 그 고민도 놓아버렸다.
희망이 없는 일상은 생각보다 곤욕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늘 발을 동동 거리던 것과 다르게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번아웃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나의 상태를 정리하기에는 나의 마음은 더 복잡했고, 나의 고민은 더 깊었다. 온 몸의 근육이 다 빠져버릴 만큼 누워 나에게 닥쳐온 시끌거리는 불행들에 한탄을 한적도 있고, 깊어진 마음의 병으로 과호흡이 찾아오기도 했다. 불안에게 져버렸다는 생각에 나는 더 더 더 불안했다.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고 있었다. 몸은 날이 갈 수록 더 약해져 병원을 찾는 일이 늘었다.
물론 이 모든 마음의 상태를 티를 내며 나 몰라라 계속 누워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에겐 너무 어린 아들이 있었고, 열심히 잘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그래도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은 아니라며 끝까지 버텨주기도 했다. 일어나 뭐든 하고 싶었지만 길게 가지 못했고 나는 늘 하루하루를 버티며 마음의 불안과 병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이 먼저가 아니라 몸이 먼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평생 해본적 없는 힘써 움직여야 하는 몸의 노동을 선택한 것이다.
노동은 많은 것을 바꿔놨다. 물류현장에서는 평균 1만 5천보 이상을 걷게 되는데 걷는 것은 물론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깨끗했던 파스텔빛 나의 운동화가 잿빛이 될 만큼 계속 걸어야 했다. 생각과 정보만을 공급받던 나의 뇌는 온 몸을 타고 도는 신선한 피와 활력넘치는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불안이나 걱정이 생겨나려고 하면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발걸음이 알아서 즈려밟아 주었다. 내 숨소리를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고, 내 몸 여기저기에 도는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해서 흐르는 땀과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은 마치 운동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말하는 운동 도파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내 몸이 움직이고 있구나. 불안은 아무 힘도 없구나. 나는 지금 이 순간 건강하고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 하는 기쁜 마음. 몸이 나의 뇌에게 엄청난 도파민을 전해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온전히 내 몸하나로 하루를 살아냈다는 뿌듯함이 온 몸 가득 차올랐다. 부정적인 생각을 할래야 할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면 나 오늘 정말 열심히 하루를 살아냈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리고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서너번쯤 노동 현장을 다녀왔을 때 한 기업의 임직원 추모영상 구성을 의뢰받았다. 원래 몸에 기본적 우울을 탑재하고 있는 인간이라 이런 의뢰는 어렵지 않게 써내려갔었는데 도무지 몸에 슬픔이 차오르질 않았다. 며칠 걷고 땀흘리며 쌓아 올린 "그래 인생 지금이 중요하지!"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따위의 긍정의 도파민이 내 온 몸을 타고 흐르고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슬퍼지지를 않았다.
슬픈 노래를 틀고, 슬픈 영상을 보고, 다운 되는 생각을 했지만 온 몸에 가득한 긍정의 기운에 과업을 해결하기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참, 이것이 유일한 노동의 부작용이랄까. 태어나 처음으로 긍정의 추가 부정과 우울 쪽에서 한참을 지나 긍정으로 기울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행복하고 반가웠다.
내 몸에 기쁨이 가득 필요한 때, 무언가 무기력하고 새로운 것이 필요할 때! 몸을 움직여야 한다. 뻔한 이야기지만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동조차 버겁고 용기가 안나는 사람들에게는 억지로라도 책임감에 몸을 움직여야 하는 육체 노동의 현장은 긍정의 기운으로 나의 뇌를 건강하게 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박스를 뜯고, 물건을 세고, 물건을 옮기고, 쉼없이 걸으면서 나의 몸은 에너지로 가득찼고, 가득찬 에너지는
나의 뇌와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스며든 긍정의 기운은 가족에게 친절함을, 나에게 무언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열정을 되찾아주었다. 노동으로 채워놓은 도파민은 긍정의 기운과 에너지로 바뀌었고, 이 것들은 중독성이 있어 나는 자꾸 또 다음의 노동을 찾아보게 되었다. 너무 소중한 긍정을 또 한번 수혈받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