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파트너와 노동현장을 누비며 자아를 찾아 고군분투하겠다는 다짐했을 때쯤 오랜 꿈이었던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아가씨 때 입던, 입고 꿰맨 것 같은 입지도 맞지도 않는 옷을 버리지도 못하고 옷 장 어딘가에 처박아 둔 것처럼 육아 그리고 현실과 타협하느라 어딘가에 구겨 넣어둔 나의 꿈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긴 시간 잘 버티고 살아온 내게 하늘이 준 선물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덜컥 꿈 같이 기회가 놓인 것이다. 기쁘기도 했고 겁도 났다.
누군가 물어보면 직업이라 말할 일도 있었고, 꿈으로 간직하던 것과 꼭 맞게 생긴 새로운 프로젝트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왜 노동의 현장으로 제발로 걸어가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은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는 나인데 이번에는 그저 움직이고 땀 흘리며 내가 왜 멈추지 않고 하루살이 노동을 이어가고 싶은지 찾고 싶었다.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은 뒤 일을 시작해도 엎어지는 일이 다 반사인 업계 특성상 괜한 기대로 들떠있고 싶지 않았다. 마음먹었던 대로 오늘을 살아내자. 그리고 또 오늘이 찾아오면 그 오늘 속에서 답을 찾자 생각했다.
이런 마음으로 찾은 노동의 현장은 신학기를 앞두고 각 출판사의 교과서를 고르고 모아 포장하는 곳의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교과서들이 한 곳에 모여있었고, 천장이 높고 창고 앞 마당이 넓어 도심 속에 있었던 물류센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전해줬다. 남녀노소 모두가 모여있는 것 같았던 지난 현장과 다르게 이곳에는 방학을 맞아 하루 노동으로 용돈벌이를 나온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학생들 속에 있으니 나도 처음 해보는 이 일을 왠지 세월의 연륜으로 더 잘 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또한 욕심이리라 마음을 다스리며 나눠주는 조끼를 입었다. 조끼까지 입으니 제법 이런 곳에서 인이 박힌 꾼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일용직 1,2,3 혹은 아무개가 되어 장갑을 끼고 컨베이너 벨트 앞에 섰다.
해야 하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컨베이너 벨트가 돌아가면 그 위에 올려진 바구니가 지나가고 그곳에 내가 할당받은 교과서를 한 권씩 집어 세트로 만든 뒤 담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것을 모아 포장을 맡은 사람들이 포장하고 바코드를 붙여 출고를 하는 과정이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키보다 더 높게 쌓인 교과서의 포장을 푸르고 책들을 내 키에 맞게 정리했다. 그 과정은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였다 폈다를 되풀이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절을 하는 것 같은 형색이었다. 나는 천주교로 불교와는 거리가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절을 올리는 불교의 108배 의식은 늘 경외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었다. 처음 몇 번은 허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번이 지나자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고, 몇 번을 더 굽었다 폈다를 되풀이 하자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잡념이 머리를 흐렸다. 온갖 번뇌가 다 지나가도록 계속해서 몸을 굽혔다 폈다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날 때쯤 허리를 폈다 굽히고를 108번쯤 되풀이했을 때 나는 오로지 허리를 폈다 굽혔다 하는 나만을 의식하는 비로소 머리가 텅 비는 무아지경에 이를 수 있었다.
계속해서 괴롭히던 부담감과 걱정, 나에 대한 고민이 잊혔다. 오로지 세 권의 책을 정확하게 바구니에 담고 있는가, 다음 바구니가 오기 전 나는 지금의 책을 잘 정리해 두었는가 하는 기계적인 움직임만 기억될 뿐. 정말로 내가 살아지는 경험을 했다. 이런 것이 108배를 들이며 오직 지금의 이 시간 속에 있는 나를 느끼고 감사하게 되는 경험 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허리를 접었다 편 후 나는 나에게 왜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두고 이곳을 찾게 됐는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108배를 들이는 마음을 노동 속에서 찾았다. 오로지 지금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 머무는 마음. 그 마음으로 108번 허리를 굽혔다 펴면 어랏! 돈까지 주네!
종교적 마음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종교 속에서 찾을 법한 마음의 강 같은 평화와 나의 시간에 대한 작은 보상까지. 마음이 든든 그리고 단단해졌다.
쌓아 놓은 교과서를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일이 끝났다. 손가락과 손목이 아프고 반복된 행동으로 허벅지와 허리가 당겼다. 그렇지만 나만의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가득 찼다. 나는 108배를 들이는 마음으로 나를 비우고, 자꾸만 차오르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띵동! 계좌에는 잔고가 쌓였다. 고작 108번 허리를 굽혔단 폈다를 하고 깨달음을 얻으려다 속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래, 이게 나 답지. 영원히 깨달을 듯 깨달을 듯 다시 실수하고 욕심내고 잘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지는 나. 이러한 나 또한 받아들이는 것. 이 모든 경험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선물 받은 소중한 순간들이다.
아! 제안받았던 프로젝트는 물론 감사하게도 일보 전진을 하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너무 들뜨지도, 너무 두려워하지도 않고 묵묵히 오늘 할 일을 해나가며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 혹시나 마음에 또 잘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라 한 발도 뗄 수 없게 불안한 날이 오면 목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고, 머리를 질끈 매고 108배를 하러 하루살이 일터로 떠나야지! 땀 속에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입금된 돈으로 떡볶이도 사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