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고민을 만들어하는 것이 전문인 나답게 '용기'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용기중에서 어떤 용기가 가장 용감한 용기일까 고민을 했었고, 결론은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가 가장 용감한 용기라고 혼자 결론을 내렸었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용기도, 무서운 것을 참고 도전해 보는 용기도 멋지고 대단하지만 스스로 가장 초라해지는 순간, 그것을 온전히 인정하며 자신의 실수라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그 무엇보다도 크고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런 기준에서 봤을 때 나는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실수를 실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거나 실수한 순간, 그것을 실수로 끝내지 않으려고 순간을 회피하고 그 일에 더 침잠되는 사람이었다.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왠지 지는 것 같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은 급기야 실수하고 잘하지 못할 법한 일은 아예 도전하지 않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특기는 분명 하나 취미가 없다. 잘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며 과정을 즐길 수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잘할 수 있는 일만 도전했고, 실패할 법한 일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노동의 현장은 실수를 피해 갈 수 없는 현장이었다. 나는 몸을 쓰는 것에 서툴렀고, 처음 하는 일에 긴장도가 높았다. 처음 경험해 보는 분위기도 한몫 도왔고, 아무리 빠르게 적응하려고 해도 1.5배속으로 일의 매뉴얼을 공유하는 현장에서 눈치껏 해내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장에서 했던 큰 실수를 생각해 보니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모든 것이 로켓같이 빨라야만 하는 기업의 물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날은 재고 물건을 정리할 새 물류 정리칸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철제장에 박스를 테이프로 고정 세팅하고 바코드 라벨을 붙이는 일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고 또 들었다. 별거 아닌 단순 노무에 지나치게 노파심이 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쉬워 보였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게 라벨을 한 줄을 다 붙였을 때 라벨 스티커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질문을 하러 담당자에게 갔는데 내가 붙인 라벨을 본 담당자는 내 질문에 대한 답변대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담당자는 나의 실수를 죄명 삼아 나의 자신감을 공개처형했다.
순간 너무나 당황했고, 머리가 아찔했지만 정말 순식간에 내 입에서 이 말이 터져 나왔다.
말하고도 너무 놀라 내 입을 의심했다. 원래의 나였으면 주눅이 들어 아무 말도 못 하거나 다른 작업을 하는 내내 마음에 걸려 앞으로의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었을 게 뻔했다. 그런데 나랑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 베스트 10을 뽑으면 기꺼이 뽑힐 것 같은 "쿨한"느낌으로 사과를 입에 뱉는 나의 실수를 인정하는 나를 발견했다.
두 번째 실수는 애만 빨리 낳았어도 아들뻘일 것 같은 20대 초반의 청년들과 함께 했던 배달 잘하는 겨레 물류 센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1시간 안에 주문에서 배송까지 모두 이루어져야 하는 현장이었던 만큼 물건을 찾고, 포장을 하고, 배달원들에게 넘기는 것까지 해결해야 하는 정신없는 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인 데다가 현장에서도 체계를 잡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정말 정말 모르겠는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물건들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야 했고, 다 떨어진 소모품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들 뻘인 아들에게 묻고 또 묻고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도 제법 세상의 흐름에 발 빠르게 적응하며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마치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는 노년의 부인이 된 기분이 들정도로 노동의 현장에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러다 수량이 맞지 않는 물건을 발견했고 주저함 없이 수량부족 버튼을 눌렀다. 아까부터 질문을 이어왔던 담당자 아들 아니 청년이 뛰어왔다. 개수가 맞지 않다고 아무 버튼이나 눌러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그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주문을 처리해야 한다며 클레임 아닌 클레임을 했다. 그리고 또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터져 나왔다.
아... 정말 쿨내가 진동하는 순간이었다. 뭘 모르고 물어보고 또 물어봐도, 뭘 하다 틀리고 또 틀려도 민폐가 아닌 미덕으로 여겨지던 어린 시절에는 입밖에도 나오지 않았던 말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해보겠다고 말하는 나의 쿨함이 그것도 나보다 많이 어린 아들 뻘의 사람 앞에서 전혀 자존심이나 자신감을 구기지 않고 툭하고 진심으로 내뱉어지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나 어른이 되었구나
나의 실수를 쿨하게 인정하는 용기 있는 어른이 되었구나
그리고 그 실수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어른이 되었구나
대견했다. 나의 실수를 쿨하게 인정하는 용기에 싹이 틔어났으니 이제 더 많은 실수를 겁 없이 해낼 수 있겠구나. 스스로 참 대견했다. 나는 이제 실수를 담담히 인정하는 용기 있는 어른이 되어 그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성장을 만날 수 있겠구나. 아들에게 엄마도 실수를 용기 있게 말하는 어른이 되기 시작했다 말할 수 있겠구나. 마음이 찡하게 뜨거워졌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진짜 나를 맞닥뜨릴 수 있다. 그리고 마흔이 다 되어서 처음 경험해 본 일용직 현장에서 새롭게 맞이했던 위기의 순간에서 만난 내 모습이 썩 맘에 들었다. 실수 앞에서 작아지지 않고, 인정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내가, 참 용기 있어 보여 엄지를 치켜들어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