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로 일하기 전까지 직장 생활을 할 때 나의 에너지를 쭉쭉 빨아먹던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째는 소문 만들러 왔다가 시간 나면 일하러 가는 인간들. 이 사람들은 특별히 공을 들여 피하고 싫어했던 유형인데 너무 병적으로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다 보니 내가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소문 장인 에너지 뱀파이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데 할애하고, 그 소식 들었어?로 시작해서 상상의 나래로 투고를 했으면 신춘문예는 따놓은 당상이지 싶게 완벽한 플롯과 극적인 반전으로 소문들을 양산해 냈었다.
두 번째로 나의 에너지를 쭉쭉 빨아먹던 사람이라면 역시 회식을 직장 생활의 비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들이었다. 수면 마취도 잘 안 걸릴 정도로 자아의 off 스위치가 잘 안 켜지는 나는 술에도 잘 취하질 않는다. 회식을 비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늘 그렇듯 누구보다 빠르게 만취의 세상으로 떠나고 정신은 맘대로 퇴근을 한다. 망언은 기본이고, 몹쓸 짓과 추태는 필수 옵션이다. 온갖 추태를 다 본 나에게 다음 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만취 에너지 뱀파이어가 인사를 하면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에너지를 쭉쭉 빼앗겼다.
셋째, 입으로 역사를 쓰는 인간들이다. 입으로는 세상도 구하고, 동료도 구하고 회사도 구할 거 같이 말하지만 정작 일할 때는 쏙 빠져서 감나라 배나라 하던 사람들. 대안 없는 비판이 그들의 전공이고, 행동 없는 계획이 그들의 특기다. 입으로 세상을 구하는 에너지 파이터들이 휴가를 가는 날이 나의 업무 효율이 쭉쭉 오르던 날이었다.
그리고 프리랜서의 삶을 살며 그들은 긴 추억으로 잊혔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일용직의 현장에서 에너지 뱀파이어를 만났다. 그날은 나에게 일할 맛 나는 일용직 현장의 바이블로 남은 교과서 분류 물류센터에 두 번째 출근날이었다. 그날 간 곳은 첫날 버스를 잘못타지 않았으면 갔을 깊은 공장 숲 속 물류센터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물류센터가 덩그러니 있었고, 모여든 사람들 서로서로 이미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이곳에 한 달씩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한 곳이었다. 첫 번째 교과서 물류센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다소 긴장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간은 넓고 쾌적했으며 아는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편했다.
일용직 현장의 공통된 룰이라면 일단 줄을 서서 인원 체크를 한다. 서로의 이름도 소속도 없는 탓에 줄을 서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줄을 서서 인원 체크를 하고 나누어 담아야 할 교과서의 영역을 배당받는 순간이 왔다. 이곳은 지난 현장과 다르게 자율을 중요시하는지 "분배 업무 현장으로 들어가세요!"라는 말과 함께 원하는 영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들 컨베이너 벨트의 끝에 있는 포장 하는 곳과 거리가 먼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흠.. 뭔가 이상한데? 왜 멀리 떨어지려고 하지? 그것도 뛰어서! 안 그래도 체력을 아끼고 아껴야 하는데 왜 뛰어서까지 멀리 가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인 물들만 알고 있는 어떤 비밀 같은 것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곳이 처음인 나와 나의 노동파트너는 태연하게 포장하는 곳과 가장 가까운 컨베이너 벨트의 제일 처음에 섰다. 비장하게 장갑을 끼고 첫 번째 책을 싣자마자 나는 왜 그들이 뛰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곳에 해가 떠도 마늘을 봐도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을 에너지 뱀파이어가 있었다. 스물 중반쯤 돼 보이는 애띈 얼굴에 나른한 눈을 가진 그 남자애는 방금 자고 일어난 사람 같았다. 끝에 다다른 바구니를 당겨 포장 업무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책을 가져다 놓아야 했지만 감시가 느슨한 현장에서 그는 절대 발 한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바구니를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손 한 뼘을 뻗지도 않고, 어느 순간부터는 환영이 보이는지 멍하니 어느 곳을 응시하며 멈춤 상태로 서 있었다. 플레이 버튼이 있었다면 몇 번이고 눌러 빠른 배속으로 돌려 일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는 참으로 강직하게 아무일도 안하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아이임에도 나태한 에너지 뱀파이어 앞에서 본능적으로 짜증이 솟구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바구니를 밀어도 보고 대놓고 눈을 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에너지 뱀파이어의 특성상 본인만 지금 상황이 뭔지 모르기에 그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손가락을 몇 번 까닥까닥 형식적으로 하는 게 전부인 그 아이는 하루일이 다 끝나도록 가만히 정말 가만히 서있다 일을 마무리했다.
어느 순간 내가 지금 이 어린애랑 뭔 기싸움을 하고 있나 싶었다. 게다가 이 곳에 온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디에나 있는 에너지 뱀파이어에게 또다시 휘둘리고 있는 내가 조금 한심하기도 했다. 아... 이 일용직의 사회도 사회구나. 사람 몇 명만 모여도 모든 캐릭터가 다 섞여 하나의 사회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머리를 정리하고 마음을 닦으러 이곳에 왔지만 이러한 에너지 뱀파이어 하나 사이에서 또 한 번 현혹되어
흔들렸다. 이 날의 결론이 이런 나를 반성하고 앞으로 연연하지 않고 나의 길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훈훈하게 끝나면 좋을 테지만, 나는 여전히 무책임하게 타인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이들에게 참지 못할 분노를 느낀다. 그가 나태했던 만큼 다음 날 나의 손가락은 배로 힘들었고, 그 통증이 다 사라질 때까지
그 어린 남자아이의 나태함에 부들부들 짜증이 났더랬다.
그렇다.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나는 참 무책임을 참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일용직 현장에서도 이런 면에서 변하지 않았던 나는 퇴근길 내내 그 아이를 일부러 찾아 눈으로 째려봤다. 그 일용직 현장이 어디든 앞으로 어디서고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