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사람들은 하지 않을, 왜 하는지 모를 고민들
정확히 어떤 일이 계기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배울 때도 초반의 긴장과 설렘이 옅어지고, 초심자에게 허락된 행운이나 기쁨이 바닥을 드러내면 한 차례 위기가 오니까. 그 위기는, '적어도 당분간 계속할 자'와 '구경 잘하고 돌아갈 자'를 가른다.
매주 교리교육을 받고 미사를 드렸다. 성당에 가는 길이나 성당 안의 구조가 익숙해진 만큼, 미사나 주보에 나오는 것들을 알았고, 신부님들과 수녀님 그리고 봉사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혔다.
예비신자에게 가르치는 교리는, 이렇게 훑듯이 지나가는 이야기들을 과연 얼마나 받아들이고 기억하려나 효과가 미심쩍긴 했으나, 한편으론 이런 것들을 미리 가르친다는 점에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또, 30여 명의 교리반 동기들을 보면서도 신기했다. 믿음이 생긴 것도 아닌데, 이렇게 알아듣기도 어렵고 믿어지지도 않는 말을 듣겠다고 6개월 동안 꾸준히 온다니. (시간이 지날수록 후드득 빠져나가겠지 했는데, 웬걸, 오히려 늘어갔다. 정말 사람들 마음에는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이 있는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겨울이 깊어가고, 혼자서 성당에 걸어가는 길도, 교리교육을 받는 교실도 쓸쓸하고 춥기만 했다. 군중 속의 일원으로 미사를 드리는 모습처럼, 내 영혼은 혼자였다.
교리교육 담당 선생님이나 봉사자들은 한편으로 친절했고, 한편으로 사무적이었다. 나는 사람들과의 친교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아니 오히려 그런 것에 얽히지 않으려 했기에, 분명히 편했다.
그럼에도, 개종이라는, 나에겐 어마한 결정과 거대한 삶의 변화를 혼자서 끌어안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내 마음은 고요할 수가 없었는데, 이 마음을 비출 곳이 어디에도 없고,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떠나온 곳에는 남편도 있고, 여전히 연락하는 같은 교회 집사님, 권사님도 있었다. 같은 교회 사람은 아니어도 믿음을 나누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들어선 곳에는 예비신자들을 담당하는 봉사자들이 있었고, 동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나와 같을까? 누가 내 마음과 상황을 이해할까?
(이런 글을 써서 남겨야겠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나는 내가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민한 사람 같았다.
나는 내 조국에서 견디기 힘든 핍박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끔찍한 전쟁 상황에서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내 조국이 너무너무 싫고, 붕괴되길 바라고, 저주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분명 속상한 일을 겪었고 실망도 했고 나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일단 떠나보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나는 내 조국을 사랑했다. 그곳에서 받은 사랑과 자라온 기억과 뼈에 새겨진 추억은 잊을 수도, 부정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들처럼 쉽게 교회에 대해, 개신교에 대해, 목사에 대해,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욕할 수 없었다. 그건 나를 너무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내 조국에서 어떻게든 견디면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그만두기로 하고, 떠나버린 사람이었다. 이제 막 도착한 나라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인상, 비교, 의문점 등을 가볍게 말하는 것도 섣부른 평가나 판단이 될까 봐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조국과 이민 온 나라는, (한국ㅡ라오스, 혹은 한국ㅡ뉴질랜드 같은 관계가 아니라,) 한국ㅡ일본, 한국ㅡ중국, 어쩌면 남한ㅡ북한 같은 관계니까, 누가 뭐래도.
우리는 비슷한 게 많았다. 차이는 작고 미묘했다. 아예 밖에서는 우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미워했었고, 싸웠었고, 이기려 했었다. 심지어 죽이기도 했다. 그 역사는 사실 멀고 오래된 이야기이고, 지금은 왜 싸웠는지, 우리가 어떻게 다르고 왜 갈라졌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이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 같지도 않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서로 데면데면하다. 상대를 팔 벌려 환영하지 않는다. 부딪히지 않으려 하고 찾지도 않는다.
나는 교리반에서 내 소개를 할 때 개신교 신자였음을 분명히 밝혔다. 입교 신청서에도, 개인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도, 배움이나 행사 참여 후 소감을 답할 때도 자연스레 개종한 신자임을 말했다. 이런 일이 희소하진 않은 듯,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반기거나 호감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아예 무감한 것 같기도 하고, 부러 조심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럴 때 나를 특별히 반겨주고 좋아해주지 않아서 내가 기분이 나빴다거나 의아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다. 이곳에서 개신교에 대해 대놓고 부정적이거나 적대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 언사를 보인 사람이 없진 않았는데, 그들도 개신교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었으니, 뭐.)
하지만 차이에 대해 말하고(교리시간이나 교중미사 중에 '개신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지만' 혹은 '개신교는 이렇게 하던데' 하는 식의 이야기가 때때로 나오곤 했다), 그런 것들이 거대하고 굳어져서 당연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무심코 드러낼수록, 그래서 나 역시 작고 미묘한 차이들을 인식할수록, 나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나는 '같은 신을 믿으나 다른 문화와 체계'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같은 신을 믿건 말건, 엄연히 다른 문화와 체계'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환영받는 신입생이 아닌, 의심받는 이방인이었다.
그곳에서 왜 왔냐고, 무슨 잘못을 한 건 아니냐고, 진짜 넘어오긴 한 거냐고, 나를 보는 눈에 그런 질문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생각났다.
전 세계의 교포.
탈북한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
한부모 가정이나 이혼가정의 아이.
돌싱.
LGBTQ.
피부색이 다른 입양아.
아무도 대놓고 그들을 조롱하거나 따돌리지 않아도(물론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속마음이 어떻든지 표현하지 않아도), 그들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이방인이라는 것을 안다. 느낀다. 명시적으로 '하나가 되고 싶'다거나 '소속감을 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냥 자기 자신이고 싶고, 개성 있는 존재로 있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든, 자신이 다르다는 걸 알고 이방인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 그들은 움츠러든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지, 있는 듯 없는 듯 있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수용되기 위해서는 너희와 다르지 않다고 보여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름을 뾰족하게 드러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체성 위에 매력을 덧칠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보통'의 사람들은 하지 않을, 왜 하는지 모를 고민들을 하는 사이, '이방인'은 주눅들고 지쳐가다가, 굳이 자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어떻게 떠나왔는데... 이곳에서 다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자니, 한심하고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