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사를 드리고

주도권이 완전히 '의식'에 있었다.

by 모도 헤도헨

한동안 치매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한참 먼 이야기일 텐데도 그 생각에 사로잡혔던 게 조금 이상하긴 하다.

그때 두 가지 이야기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었다.


하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라도 자연 안에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아, 역시 자연엔 그런 힘이 있구나.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시간의 흐름, 앞뒤 맥락 이런 것들에 대한 인지능력과 별개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천주교 신자인 지인이 한 말이었다. 아주 연세가 많은 분들이 미사 때, 완전히 몰입하여 드리고 어떤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교회에 다닐 때였는데, 충분히 이해되었다. '의식'이라는 건 사람을 가두기도 하지만 바로 서게 하는 힘이 있으니까. 수천 번 몸에 익은 대로, 어떤 고귀한 일을 치른다는 생각은, 그 마음가짐은, 사람을 잠깐 동안 고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연’이나 ‘의식’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게 한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는 중인지, 모든 게 막막하고 길을 잃은 것 같을 때에도, 나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삶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이든 자연 속을 많이많이 거닐기로, 예배나 요가 같은 의식에 꾸준히, 마음을 다해서 참여하기로, 일상의 작은 일들도(예를 들면 목욕이나 빨래 개기 같은 일) 의식을 치르듯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었다.





35년 개신교 신자였는데, 천주교에 '입교'하게 됐다.("프롤로그: 아니다 싶음, 돌아오면 돼")

그 시작은 '입교식'이고, 미사 중에 치른다고 했다.


드디어 처음 미사를 드리던 날. 성당에 들어가, 성전 앞 한가운데 비워진 자리에 앉아 있노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엉뚱한 시도를 하는 건 아닐까, '여기저기 기웃대는 사람'이 되긴 싫은데, 얼굴만 팔리게 되는 건 아닐까(우리 동네 사람들이니까..). 이 길이 맞을까.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까.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할까. 설레기도, 떨리기도 했다.

성전이란 공간의 낯설면서 익숙한 공기, 부산스러운 조용함이 몸에 닿았다. 긴장되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당신께 왔습니다. 인도해 주세요."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예배 중에 영혼이 고요해지는 느낌을 좋아했다.

말씀을 듣다가도, 찬송을 부르는 중에, 기도 시간에, 나는 언어를 넘어서는 사고의 상태가 되곤 했다. 명상을 하듯, 고요해지고 날렵해졌다. 잡념도 불안도 사라지고, 흩어진 보물 조각과 숨은 단서를 찾듯 생각의 흐름이 잡혔다.


지금 나는 부유하는 먼지 같았다. 생각도 마음도 영혼도 모아지지 않아, 두 손을 꼭 잡고, 이 미사 중에, 성전의 성스러운 기운을 받아, 깊이 생각하고, 고요해지고 날렵해지리라, 기대했다.


미사가 시작되고... 나는 금방 당황했다.





미사는, 한마디로, 바빴다.


몸이 바빴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미사 내내 계속 했고, 무릎 꿇었다 일어났다도 두 번, 앞에 나가는 것도 두 번(예비신자는 한 번이었지만), 서로 인사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성호를 긋고, 작은 십자성호도 긋고...(그 간단하다 할 동작도, 정확히 모를 때는 어색하기 그지없다)


몸만 바쁜 게 아니다. 정신도 없다. 글자가 빼곡히 적힌 '미사통상문'을 손에 쥐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따라 읽으면 되긴 했으나, 어떤 것은 건너뛰어서(가/나/다로 나뉜 것 중 하나만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헤매고, '...'로 생략된 부분은 생략된 부분이 어디인지, 언제 끝나는지 몰라서 놓치고, 앞의 화면을 따라야 할 부분이나 성경책 혹은 성가책으로 시선을 옮겨야 할 때를 몰라 머뭇대고 주춤대느라 땀을 닦다 보면, (아참, 성가 립싱크도 빠뜨리면 안 되지) 마침내 미사가 끝나 있다.


정말이지, 한 시간 동안 노동을 한 것만 같았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드디어 '미사통상문'은 놓고 다니고, 자비송/대영광송/화답송 등은 성가책을 보지 않고도 부른다. 가끔 기도문을 틀리지만(특히, 개신교식 주기도문과 신앙고백은 암기된 게 아니라 무조건 반사 수준이라..), 티 안 나게 넘어간다. 앉았다 일어났다, 무릎 꿇었다 일어났다, 성호경, 앞에 나가는 것 등등 움직임에 주위를 흘깃대지 않고도 반 박자 늦지 않고 해낸다.


첫날 어땠냐는 남편의 물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라고 답했는데, 고요하고 느긋하게 명상에 잠길 틈은 여전히 없지만, 이제는 그렇게 정신없는 시간은 아니다. 잠깐씩 딴생각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미사 순서에 대한 감이 없다. 예를 들어 개신교 예배는, 어떤 교회에서 어떤 찬양을 하든 나는 마치 '눈 감고도 알지' 수준으로 익숙하다. 실제로 훨씬 간단하기도 하다. 시작의 의식, 중간중간 찬양과 기도, 말씀(설교), 광고, 끝. (그럼에도, 예배가 난생처음인 사람에겐 마찬가지로 혼이 나가거나 진이 빠지거나 하는 경험일지도..)

그런데 미사는... 나로선 기승전결이 잡히질 않는다. 분명 끝나는 분위기였는데 다시 시작하고, 중간에 생뚱맞게 인사를 하고...


오랫동안 친정엄마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했고, 직간접적으로 전도하면서, 친정엄마가 차라리 성당에 다니면 괜찮겠다, 생각했었다.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드러나게 돼 있는 교회의 분위기보다, 글도 잘 못 읽고 노래도 잘 못하는 노인에게 적응하기 편한 곳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어버버 하면서, 이거 안 되겠다, 엄마한테 너무 어려워... 했던 판단도 아직 그대로다.





그런데 나는 그 시간이, 바쁘고 정신없는, 땀 흘리고 노동한 것만 같은 미사가 뜻밖에도 좋았다.

정말로 '제사'를 드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사라는 건, 드리고 나면 힘들어야 마땅한 게 아닌가?


개신교 모태신앙이었으면서 첫 미사 후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이거였어"라고 했다던 A언니의 남편이 떠올랐다. 나와 같은 걸 느꼈는지, 나와 같은 의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처음으로 '몸'으로 예배를 드린 것 같았다.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영적인 느낌으로 충만한', '지적으로 깨닫는' 예배가 좋은 예배라고, 은혜로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든,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고,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사, 특히 내가 지금 뭐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고, 무언가 느끼거나 깨달을 여유조차 없이 드렸던 예비신자 때의 미사는, '몸'으로, '겉'으로 드리는 예배였다. '형식'을 겨우겨우 좇아가느라 '내용'은 인식조차 못했는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주도권이 완전히 '의식'에 있었다. 그걸 따르는 내 마음은 낮고 비어 있었다.


이렇게 뭣도 모르고, 힘들게 드리는 제사를, 내가 무언가 깨닫고 누리듯이 드리는 제사보다 더 기쁘게 받으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고, 이런 배움이 너무나 소중했다.




keyword
이전 04화미사를 한번... 네? 6개월 교리교육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