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렌지족이다. 집, 직장 모두 지하철 3호선이어야 이를 수 있고, 환승을 귀찮아해 웬만한 일은 3호선 역 기반으로 해결하는데, 그 3호선의 컬러가 주황인 바. 오렌지족이라 네이밍 했다.
한 때 우리나라를 뒤흔든 그 오렌지족과는 당연히 동음이의어. 그 분들과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니. 당장 하루만 놓고 봐도, 원조 오렌지족의 당시 일상이란 매일이 스페셜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주황색 노선을 하루 벗 삼는 셀프 오렌지족의 매일엔 별 게 없다.
다양한 색의 선을 여러 횡과 열로 교차시켜, 사방을 오갈 수 있게 배려해 놓은 도시에서, 주로 한 가지 선 위에서만 생활을 영위한다는 건 생각 그대로다. 그날이 그날 같은. 기시감과 데자뷰의 반복과 연속.
하지만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 해도, 너무 그렇게 맞는 말만 띡 해버리면 정말 별 볼일 없는 것 같아 슬프니,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고 다람쥐 챗바퀴인 건 맞으나, 그 우물과 챗바퀴가 쪼금 다르다는 해석을 하겠다.
먼저 우물은 동그랗게 깊은 것이 아니라, 길고 곧고 얇은데 여기로 저기로 종횡무진도할 수 있는 우물이고. 다음 챗바퀴는, 그 바퀴를 내가 안 굴리고 열차가 굴리니 나는 세상 편하다는 정도?
우리나라처럼 환승 시스템 잘 갖춰진 데도 없음인데. 고거 몇 발짝 더 움직이기 귀찮아 개구리와 다람쥐를 자초하여 산다는 게 한심스러울 수 있고, 답답하지 않나 싶을 수도 있다. 헌데 다행히 우려만큼 단조롭거나 지루하지만은 않다.
3호선 근처인 집에서 나와 5호선 인근인 직장에 도착해, 점심은 9호선 앞 식당에서 먹고 퇴근 후 저녁은 2호선 어느 역 핫플에서 먹는다고 그 하루가 크게 버라이어티 할까? 익사이팅하게 피곤만 하지.
지하철 모든 노선에 만남용 핫플이며 정서 함양을 위한 문화 공간 등의 인프라가 너그럽게 구축돼 있으니. 3호선 우물에서 챗바퀴 돌리는 일상이라한들, 부족한 건 없다. 부족한 거라면 내 체력과 의욕, 시간일 뿐.
근데 이렇게 말하니 무슨 3호선 차고지부터 종점까지 죄다 훑고 다니는 유랑객 같은데, 실상 주로 가는 곳은 회사와 집이 있는 역. 그 두 역 사이만 왔다리 갔다리 하는 탓에, 3호선엔 어떤 명소가 있고 어떤 특색이 있다며 정리를 못 한다는 게 함정이다. 물론 내가 서울메트로 관계자도 아니고 해야 할 의무는 없다지만.
그럼, 그런 소개를 할 것도 아니면서 왜 스스로 오렌지족이라 칭하며 3호선 인생의 전주를 틀었냐.
장장 9일간의 연휴를 마치고 오늘 다시. 평상시 그래왔던 대로 콩나물 빙의해 3호선을 타고 출근했다 3호선을 타고 퇴근하는 일상을 찾으니. 뭐랄까. 되게 깝깝한데 한편으론, 대체 어째서 안정감이 느껴지고 난리인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거기서 시작했다.
가야 할 일터와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뭐가 이리 애틋하고 다행이고 갑자기는 막 감격까지 하려는지. 놀이기구 무서워해 타본 적은 없지만, 어쩔 땐 티익스프레스보다 두려웠던 출퇴근 지옥철에, 오늘도 이 한 몸 비집고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에, 소름 끼치게도 감사함이 드니. 이거 증상이 이 정도면 지하철 노선이 내 인생에 그어진 한 획이겠구나로 정리되었다.
이십 대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직관적인 선을 고르자면, 그 답은 어쩌면 그 무엇도 아닌 지하철 노선. 그중에서도 3호선일 것 같았다. 없어 보여도 어쩔 수 없는 게, 사실로 보나 현실로 보나 그게 가장 정직한 선택임에 틀림 없으리라.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분명 피곤하고 다시 출퇴근이라니 싫고, 다음 연휴를 찾아보고 하는 와중에도 내 마음을 왠지 모르게 평온하게 해 준 안정감은 그래서였던 것 같다. 내가 내 인생의 그 선 위에 다시 놓여서.
이래놓고는 당장 내일 출근부터 궁시렁궁시렁. 안 봐도 비디오지만. 출퇴근 때마다 3호선 열차에서 한 몸 건사하는 게 아찔하고 처참하다며 마른 숨을 내쉬겠지만. 그 시간대의 그 열차를 타는 일도 필시 한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 이제 길면 20년 더 할 수 있는 스케줄이니. 그 점을 부지런히 상기하면서 주 5일 지옥철에 몸을 맡길까 한다.
내일 아침 만나게 될, 나의 또 하나의 가족인 오렌지족분들. 내일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라고 하니 모두가 더욱 중무장한 채 지하철을 타게 되겠죠. 옷 부피가 커져 자리가 더더욱 비좁아지더라도, 우리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 잊지 말아요. 저부터가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