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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숙녀 Feb 21. 2024

어쩌면 디폴트는 행복일지도


나는 요즘, 지난 십여 년 내염증과 같았으나 내가 속한 사회에서의 영양가나 영향력은 미미한. 누군가를 버지 못하고 수치스럽게도 그만, 정서가 파괴되어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이런 나의 지금은 불행과 행복 중 어디 더 기울어 있을까?


그 답은 굳이 던지는 질문을 힌트 삼아 유추할 수 있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추측이고 뭐고 하기도 우스운 게, 이미 제목부터가 너무 강력한 스포이기 때문.


작정하고 스포한 것과 같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행복이다. 보통의 이해 헤아린다면 불행 쪽이 더 어울리겠지만, 지금 관점에서의 대답은 공교럽게도 그렇다.


물론 어색하다. 마음이 아 찾는 곳이 정신과인데, 그곳을 다니는 중인 사람이 행복하다... 저 두 개가 어디 나란히 놓여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인가. 그 부조화는 나 역시 알고 있는 바. 허나 렇다면서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근황행복에 가깝다 말하는 이 아집을 이렇게 당당히 펼칠 수 있는 것은, 둘 가운데 내가 놓은 연결고리 때문이다. 정신과와 행복 사이에 들어가는 접속사.


정신과에 다닌다. 그래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정신과에 다닌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내 행복의 원천은 '그럼에도'다.




나는 행복에 대한 역치가 낮다. 내게 만족감이란 거창하고 특별한 것에서 기인하지 않기에, 일상 군데군데에서 풍요를 얻는다. 이를테면,


칼로 썰어먹는 스테이크보다 가위로 잘라먹는 삼겹살이 더 맛있고

포크 돌돌 돌려 먹는 파스타보단 결 거친 나무젓가락으로 후 불어 먹는 잔치국수에 더 군침 돌며,

파리 미끄러질 듯 정갈한 빗면의 사시미도 좋지만 젓가락이 향하는 건 투박하게 썰린 도다리 막회.

거기엔 역시, 궁합 볼 것도 아닌데 몇 년 산이고 어디 산인지가 왜 중요한지 모를, 드라이도 하고 스위트도 한 와인 한 모금보다는 이거 없어서 저거 마셔도 그게 그거인 소주 한 잔이 더 귀한




사회적 시선과 타인의 기준에서, 내 행복은 시대착오적으로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완벽지 않은 요소를 저렇게 갖고 있으면서, 적당히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굉장한 이해심을 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래서 충분할 수 있었다.

다 가지지 못해서.


결핍을 자각했을 때 따라 건 자괴감이 아닌,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


나는 내가 불쑥 느끼게 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라는 데에 주목한다. 어떤 해프닝이나 이벤트로 느닷없이, 이따금 직면하감정이 슬픔의 종류라는 건, 그전까지 를 지배해 온 감정은 적어도 슬픔은 아니라는 얘기 되기 때문이다.


날씨에서의 특이점이 오늘은 화창하겠습니다가 아닌 오늘은 비가 오겠습니다이듯, 내 일상의 특이점 역시 오늘은 즐겁습니다가 아닌 힘듭니다라서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러한 접근이라면 나를 정신과까지 가게 한 인물이 내 도드라진다는 것 또한, 내 주변에 그와 같지 않은 이들만 있어왔다는 뜻 되니 말이다.




음식이고 사람이고 예술이고 그게 무어든,

내 기준선 이상의 것은 자극적으로 와닿기 마련.


질서보단 무질서에 혼을 뺏기는 법이고, '갑자기'를 노련하게 당해내는 꾼은 드문 탓에, 대부분의 나는 약간의 자극에도 압도 당하고 조금의 타격에도 휘청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결국 나의 바탕은 누군가 헝클어 놓은 일시적인 내가 아니라, 스스로가 지켜온 꾸준했던 나라는 것. 리고 끝까지 남역시 후자라는 것.


바닷물에 시냇물을 아무리 쏟아부은들, 바다가 시내가 되진 않듯 나를 아무리 뒤흔들어놓는다 해도 나의 디폴트는 나일 수 밖에 없는데, 앞에 한 단락 고비와 소수의 빌런쯤이야. 무엇이 대수고 문제일까.


어쩜 앞으로 나는 변태처럼, 힘들어져라 힘들어져라, 힘들어지길 퍽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럼에도 내 기본값은 행복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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