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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씀씀 Apr 04. 2024

나는 꽃, 이것은 꽃타령


꽃이 폈더라. 어제 퇴근할 야 알았다.


한 대 얻어맞은 느낌.


그제까지도 못 본 거 같은데 언제 피었지?

내가 그렇게 두문불출, 비타민D 결핍체어?

 니는 길목으론 꽃나무가 한 그루도 없던 거야? 등등등... 갖가지 충격으로 머리가 띵.


본의도 아니고 때도 아니게 어제 그제, 그 끄저께를 복기하느라 열을 내는데, 사정 없이 분주한 머리와 달리 마음은 평온했다.


내가 별안간 마주한 것 불청객은 아니지만

분명 이 상황은 갑분꽃. 내게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없던 꽃이 하루아침에 핀, 좀처럼 이해 못 할 상황임에도 내 마음은 눈앞 비주얼에 당황스럽기보단 몽글몽글하니, 신기한 일이었다.  


'갑자기'란 보통, 아무리 반가운 것이더라도 예상 못했다는 당혹스러움에, 필연적으로 피로가 수반되기 마련인데. 이 상황에선 하루살이 눈곱만큼도 그런 감정이 없으니 찌 안 신기하겠는가.


허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를 바로 수긍하게 되고 마는, 너무나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


얘는 꽃이었다. 것도 봄꽃. 심지어? 벚꽃.




세상에 꽃을, 그것도 벚꽃을 피로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꽃이 업인 화훼단지 상인, 플로리스트, 지자체의 꽃 축제 담당자 같은 분들이야 물론 이따금 피곤하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고단하시다가도 이내 그 자태에 색감에 향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들이 준비한 꽃에 마냥 행복해하는 사람들 모습에 피로고 고단함이고 한 순간 스르르, 줏대 없이 녹아내리고 말지 않을까 하는, 꽤나 합리적 의심이 드는 바.


꽃과 인간과 피로라. 인간이 꽃 때문에  피로해한다기보단 꽃이 인간으로 인해  피곤하다고 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결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어제 퇴근길의 잔상이 길다.


언제 이만큼 먹었는지도 모르게 서른아홉 돼서는 1월 지나 2월 가, 그 이름도 찬란한 '춘'삼월지 꽉꽉 채워 보더니, 다음 챕터는 무려 계절의 여왕님인 상황. 당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봄이 온 것을.


그러니 대충 이 언제쯤 꽃도 피겠거니 으레 여겨왔다지만 맙소사, 나의 무심결을 이렇게 별안간 활짝 핀 채로 덮 줄이야.


그런데 거참 어찌나 홀연한지, 겨울바람 입은 공기 속에서 기척도 없이 어느새 펴서는 금세 또 갈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오늘, 바람에 제 한 몸 아낌없이 맡기 휘날리는 걸 보니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이번 주말이겠네 싶다. 내 속도 모르고. 나도 무심했지만 너도 무심하구나.


이렇게 갑작스레 펴놓고도 참 새삼스레 예쁜데, 내년엔 얼마나 귀하려나. 다음 해면 내 나이가 무려 어떤 유혹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 춘추니, 내년엔 이 꽃들에게마저 덜 매혹당하려나? 싶기도 하지만 글쎄. 그 꼿꼿한 나이도 봄꽃 앞에선 꿈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내가 봐 온 바로는, 꽃 앞엔 아이들보다 어른, 어른보단 어르신들이 더 줄지으셨고 약해지셨으니까.


예전엔 이유를 몰랐다. 대다수의 어른들이 왜 꽃만 보면 사진을 찍는지. 이해도 안 갔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꽃 선물에 왜 그리도 환희하는지.


지금도 이유를 완전히 알거나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 좀처럼 영문을 모르겠고 도통 공감 안 가 모습들에 내가 한 발짝 가까이 있다는 만은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좁혀진 거리 가 나이 들어감에 대한 새삼스런 자각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함께.


아기가 예뻐지고 아이들이 좋아지면 결혼할 때가 된 거라는 말처럼, 꽃에 설레고 꽃을 어떻게든 담아놓고 싶다는 건 내가, 여지껏 보고 커 온 어들처럼, 인생 희로애락에 발 한 번 씩은 들여놔 본 진짜 어른 되어가는 중이란 신호이리라.


나이 들수록 작은 큰 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아무 게 되고. 전보다 더 가지게 됐지만 손에 쥔 건 없고, 옛날보다 많이 채운 거 같은데 많이 외롭고... 해지는 것처럼 꽃도 말이다. 같은 꽃인데 재작년 꽃, 작년 꽃, 올해 꽃이 다르다.


꽃이 꽃이지 하던 게 예뻐보이더니 계속 보고 싶어지고, 누가 꺾으면 썽나고 지는 걸 보노라면 슬프고 또 필 걸 아는데도 휑하다. 꼭 인생 같아.


짧게 피어줘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 있으면 뜨거운 볕, 억센 바람, 날카로운 빗줄기에 거친 모랫가루에, 매캐한 매연에 야들야들 연약한 잎 다 상해서 세상 흉한 꼴 온몸으로 겪고 시드는 일 밖에 없을 테니. 짧고 굵게 제일 좋은 볕, 푸른 하늘, 사람들 환호, 초롱한 눈빛만 듬뿍 머금고 홀연히, 예쁘게 져주어서 고맙다고.




꽃이 인생이라면 반대로 나는 꽃일 수도 있겠지. 행성마다 시대마다 다르나, 지금 세상을 기준으론 보통 한 번 피면 100년 정도 만개했다가 지는 인간이라 불리는 꽃.


그래 그런 거라 치고. 그렇다면 나는 내게  남은 봄날. 더 만개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문다.


남은 날들에 바람 불면 그 결 따라 잘 나부끼고, 비가 몰아치면 이때 놓치지 말고 갈증 해소! 이따금 볕이 좋을 땐 잘 즐기고 기억하면서, 제법 꽃다운 사람으로 피어날 것.


왜 우스갯소리로 한 번씩은 다 해 본 그 말. 꽃이랑 사진 찍으면 뭐가 꽃이고 사람인지

분간 안 되는 바로 그 느낌 살려서 말이다.


자, 꽃들아 메모하렴.

내년 이맘땐 내가 너희를 구경하는 게 아니라 너희가 날 구경하려고 피게 될 거야. 

주객전도, 전세역전이랄까?


 말도 안 되는 걸 동기부여 삼아, 난 지금보단 쬐금 열심히 살아볼게. 나약하고 나태한 이 인간의 핑계가 좀 돼주렴.


수락한 걸로 알고 이만 줄일게.


오늘 클로징곡으론 이것만 한 게 없겠지? 안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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