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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Aug 10. 2024

나를 찾는 시간, 82년생 mz 싱글 맘의 이야기

두 번 이혼해도 나의 아이를 키우련다.

이번 챕터에서는 다소 페미니즘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2020년대의 저출산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자의식이 강한 mz세대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소재가 아닐까 싶다. 많은 젊은 이들이 '출산'을 두려워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을 기피하고 어렵게 생각한다.

더구나 여성이라면 더더욱 내 몸이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박탈당할 '자유'를 희생하면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책도 없이, 결혼을 하자마자 아이를 출산하고, 또 출산을 한 뒤 얼마 안 돼 이혼한 mz 싱글맘으로서 파란만장했던 양육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미처 짐작도 못 했다.
한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이 이토록 위대한 일이며,
희생이 요구되는 엄중한 책임의 과정이라는 것을.
더불어, 나와 꼭 닮은 아이를 기른다는 일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황홀함을 준다는 것도...
양육이라는 것은 그만큼 고되고, 고된 만큼 귀하고 값진 선물과 같은 일이다.
다시 결혼을 하고, 또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내 아이를 낳아 기르는 행운을 얻게 된다면
두 번 이혼을 한다 해도 그 결정에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이혼 직후에 나의 아기는 6개월 남짓한 그야말로, '응애응애' 울며 말도 못 하는 '베이비'였다.

나는 의도치 않게 건강한 아기가 모유를 원하는 덕에 '완모'하는 아기 엄마로서, 이혼 따위는 신경 쓸 여유도 없을 만큼 신생아 육아에 바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모유수유를 해 본 엄마들은 알 것이다. 한시도 아이 곁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아기에게 엄마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을 공급해 주며,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편히 잘 수 있도록 안정감을 주는 정서적 울타리이며, 눈에 보이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절대적인 존재더라. 그런 상황에서 내가 힘들다고 하루라도 아이 곁을 떠나 혼자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 시절에는 '힘들고 슬퍼할 여유'도 없었던지라,
때로는 아이를 독박 육아 하는 것이 버겁다고도 느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기대했던 삶의 경로에서 이탈해서 이리저리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했던 철없던 엄마였던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정신 바짝 차리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나의 아가였다.


그토록 소중하고, 순수하고,
절대적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순결한 존재를 살면서 만나본 적이 없다.


나의 아이와 만나서 함께 살아가며, 그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그 모든 과정, 순간순간이 기적 같았다. 정말로, 그런 일은 기적이리라.


나는 장녀였지만, 나보다 먼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동생 덕분에, 조카 사랑도 경험해 봤었다. 그래서 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결혼한 사이에서는 당연한 기쁨이 아닌가 여겼었다.

그런데 내 아이에 대한 마음은 조카에 대한 사랑과는 견줄 것이 못 됐다. 물론 조카도 너무너무 예쁘고 소중하지만, 절대적으로 나만 바라보며, 내 뱃속에서 열 달을 품고 한 몸이었다가 분리된 또 다른 생명체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다.

지금도 가끔, 나비 자세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이를 바라볼 때면 이 아이를 내 몸에서 낳았다는 것이 꿈인가 싶을 때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그토록 아이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김에도 불구하고,
자의식이 강하고,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온 열혈 사회인 중 한 명으로서,
일과 양육을 오롯이 혼자 다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워킹맘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자아'를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희생해 가며, 가족을 책임진다는 것의 버거움을. 30,40대 젊은 엄마 아빠들이 육아와 직장을 병행해 가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출근 전 어린이집 등원이나 학교 등교시키는 전쟁부터 시작해서, 퇴근 후에도 자녀 양육에 교육까지 책임져야 하고,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 맡길 곳을 찾아 헤맨다. 주말에는 아이를 위해 각종 체험과 놀이를 경험시켜줘야 하고, 식사 준비는 아이용, 어른용 이중으로 해야 하며, 남들 다한다는 건, 내 아이에게해주고 싶은 욕심에 경제적 부담도 가중된다.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힘든 점을 꼽아보자면 점점 잃어가는 나의 자아정체성이었다.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사회적인 욕심도 있었는데, 아이를 홀로 키우려다 보니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둘이 해도 힘들 육아를 홀로 담당하다 보니,
나를 찾을 시간은커녕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산 지 오래였다.
더구나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던지라, 스스로에 대해 가혹하게도 몰아붙이며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을 미뤄뒀었다.

 

그러다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내가 참 힘든 것을 잘 참아왔구나. 지금 이렇게 아이를 키워내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칭찬받아 마땅했구나.. 그래. 그동안 버텨내느라 참 애썼다.. 너무 잘 키우려고 바둥대지 말자.. 이걸로 충분해. '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독박육아를 한 지 5년 정도 됐을 때, 비로소 '나 스스로'를 돌봐야겠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사실은 그동안은 육아가 힘들다는 평범한 가정의 엄마들을 보면 '참 부러운 소리 한다. 하루라도 내 짐을 나눌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좋겠다. '라고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싱글맘이나 싱글대디들이 이런 힘듦을 어디 말할 곳도 없이, 속으로 고통을 삼켜가며 지내고 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절로 아련해진다.


독박육아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답답하고, 고생스럽다. 그러나 육아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싱글맘이라서 더 힘든 부분도 있겠지만, 정상 가정이라고 해서 어디 육아가 쉽기만 하겠는가?

어차피 다 똑같은 입장이 아닐까. 퇴근이 늦은 남편 때문에 힘들 수도 있고, 육아관이 맞지 않아 갈등인 가정도 있을 있고, 맞벌이를 하는 워킹맘들은 가정일과 직장일의 가지 책임을 해내느라 몸이 녹초가 수도 있다.


  

다시 자아정체성에 관해 생각해 보자.


출산 후 다른 모든 것보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우선이 되기 시작하면서
자아정체성의 혼란부터 직업 세계에서의 도태, 스스로를 잃어버린 것 같은 우울감, 고립감이 생기게 되더라. 차라리 직업 세계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육아에만 전념한다면 엄마 노릇이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mz세대의 끝물'인 1982년생이다. 자라오는 동안 내가 남자 친구들과 동일한 '사회인'이 되는 것을 한치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수십 년 간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옆자리 남학생들과 같은 달리기 코스를 지나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지만, 아이를 출산하는 순간부터 여성들의 삶은 남성의 그것과 달라진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니, 어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것처럼 나 스스로의 능력을 자꾸 의심하게 됐다. 직장에서의 고과는 물론이거니와 내 아이가 사회적, 신체적, 학업적, 정서적으로 정상적으로 잘 자라고 있는 건지에도 자신이 없었다. 누가 뭐라 한 것 아닌데,“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게 된 건 일하는 엄마에 대한 편견 때문 일까? ‘노 키즈 존’이나 ‘맘충 사절’ 등의 문구를 볼 때면 우리 아이들의 천연덕스러운 꾸밈없는 웃음소리가 저들에겐 소음인가 싶어서 서러워질 때가 있다.


  ‘워킹맘’이라는 단어부터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워킹 대디'라는 말은 잘 안 쓰는 걸까? 아빠가 일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엄마가 일하는 것은 특별하게 여기는 사회.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참 억울한 일이다.


엄마가 된 이후로 내 삶의 주인공은 아이가 되었다. 나는 이름 대신 ‘**엄마’라는 별칭으로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는 소설 속 부수적 인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엄마로서의 삶에는 ‘기다림’이 가득하다. 임신 기간에는 정상적인 출산을 기다리면서, 돌 전에는 아이가 걸음마를 떼기를 기다리면서, 두세 살 때는 말문이 트이기를 기다리면서, 유치원 입학과 졸업을 기다리면서. 기다림 속에 보낸 육아의 시간들은 내게 두 사람의 인생을 사는 듯한 바쁨을 선사했다. 육체적으로도 바쁘지만 마음적으로도 여유가 없을 때가 많아졌다. 아이 등하원 시간에 쫓기면서, 직장에서 내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애를 쓰지만, 어쩔 수 없이 공백이 생기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업무에 시달린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퇴근길 '치맥 한 잔'.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일 저녁의 시간을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오로지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는 것. '나만의 시간'을 갖고, 처녀 적 내 모습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가끔 호텔에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냥 멍 때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워킹맘의 머릿속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장담컨대, 나를 위한 생각은 몇 프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정말 단호하게, 쉬었으면 좋겠다. 번 아웃되기 전에, 세상의 많은 일하는 엄마들이 오로지 그녀들을 위한 시간을 갖고, '쉼'을 가지는 건 어떨까..라고 제안하고 싶다.    

 

  아이는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식물처럼 정상적으로 잘 자라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엄마인 나보다는 훨씬 젊고, 체력이 넘친다.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건강하면 된 거 아닐까? 신체에 영양 공급을 하듯, 마음에도 영양 공급을 해야 하니까.   

  아이 간식을 챙기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엄마인 우리들의 마음에 영양을 주는 일이리라. 건강하고 행복한 부모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어떤 사교육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달리기에는 종착점이 있을 것인데, 어째서 엄마라는 달리기에는 목적지가 없는 것일까? 누가 정해주지도 않았고, 다들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고 있어서, 어떻게, 얼마나 빨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82년생 김지영’의 영화 속 주인공은 육아를 하면서 말을 잃어버리는 극단적 상황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서 그녀가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듯이, 일단은 다시 '나'를 찾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예전의 활기차고 열정적이었던 내 모습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 석 자로. 남들의 시선은 상관없다. 바쁘고 쫓기듯 살면서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내가 설계하고 의지한 대로 시간을 활용하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련다.


싱글맘의 육아도 별로 다르지는 않다. 다른 가정과는 조금 특별한 가정환경 속에서, 내 아이가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고 건강히 잘 자라주길 바랄 뿐이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기도 벅찬 세상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기를 선택한
수많은 용감한 싱글 맘, 싱글 대디들의 고된 하루를 응원한다.
우리들의 고생 끝에, 잘 자란 아이들의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홀로 양육하느라 고생한 부모의 노력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더 바르게 자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아이는 결국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ps. 교사로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본 입장으로서 덧붙이자면, 의외로 모범생 중에도 한 부모 가정인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지역은 교실의 1/3이 이혼가정이라고 하던데.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한 부모 가정도 부모 나름이고, 아이 나름이다. 부모님들이 인성적으로 훌륭하시고,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 하시는데 아이가 엇 나갈 리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고생하는 어려운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아이들이 스스로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이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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