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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Oct 02. 2024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생

서울에서 수도권 소도시로, 옮겨가다.

이혼이라는 거대한 삶의 격변 상황에서 마주치는 변화 중에 삶이 뿌리채 흔들릴 만큼 큰 변화는

거주의 이동으로 인한 영향이다. 많은 연구에서 '주거의 이동은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 또 주거의 이동은 더 나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거나, 무언가의 실패로 고향 등으로 귀환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혼 후 내가 겪은 이동은 후자의 이유가 컸을 것이다.


내 경우, 갓난 아이를 데리고 이혼했기 때문에, 함께 아이를 봐줄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도시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나름대로 경기도에서 학군이 우수하다는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곳을 버려두고  낯선 지역으로의 이사를 감행했다. 이사를 하는 나에게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아쉬운 맘을 감추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안 될 만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사실 혼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눈에 뭐가 씌인 사람처럼, 감정을 느낄 순간도 없이 일에 전념했고, 직장에서는 나름 중요한 업무를 맡아 내 한 몸 희생하며 아이도 키우고 일에도 충실했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 직장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갔고, 망가진 건 내 몸이었다.


긴급히 보내야 할 공문 때문에 노트북을 왼 손에 들고, 책과 지도서 등을 오른 손에 들고 곡예를 하듯 계단을 내려가다가 허공에 발을 딛어버렸다. '오 마이 갓'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덤블링하듯 계단을 굴러 낙하했다.

무언가 깜깜한 정적이 흐른 뒤, '어떻게 된 거지'하고 눈을 뜬 순간,

다행스럽게도 계단에 있던 내가 가르치던 몇 몇의 학생들이 내 몸을 지탱하며 받아주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아이처럼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거의 아이들에게 안긴 채로 보건실로 직행했다.

오른쪽 발목이 끊어지는 것처럼 통증이 커져갔다. 이런 아픔은 난생처음이었고, 크게 다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걷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휠체어에 실린 채 동료 선생님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가서 목발을 짚은 채로 집에 돌아왔다.


혼자서 걸을 수가 없으니 바로 육아에 공백이 생겼다. 집에서 아이 어린이집까지는 대략 1km로 보통은 출퇴근하면서 차로 픽업했었는데, 4살 아이더러 혼자서 걸어오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첫 일주일 정도는 주변 아이 친구 엄마들이나 지인찬스 등으로 어떻게 버텼지만, 부상이 꽤 오래가서 앞으로 2달 정도는 운전도 힘든 상황이었다.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앉아서 수업을 하고, 목발을 짚은 어정쩡한 걸음으로 보행을 하며 아이 손을 잡고 등하원을 했다. 한 손은 아이 손을 꼭 쥐고, 한 손은 목발을 잡으려니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조차 너무나 버겁고 힘들더라. 장을 보기도 어렵고, 집안 일도 쉽지 않았다. 이럴 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강하게 살려고 애썼던 마음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렇게 혼자 애쓸 필요가 있나? 나는 누가 돌봐주지? 내가 아프면 아이는 누가 돌봐야 하는 거지? 언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이대로 계속 지낼 수 있나?'

2019년 가을. 그렇게 나의 3년 간의 독립투쟁은 끝나갔고, 결국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되겠다는 판단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아이가 초등 중학년이 된 현재까지, 친정찬스로 나름 편안하게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거주의 변화'는 싱글맘의 육아라는 삶의 안정성을 도모해주기도 했지만, 원래 꿈꾸던 인생의 경로에서 이탈하며 삶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깨버리며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이대로 눌러앉아 아이나 키우며 조용히 지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무언가 '나만의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다. 결혼은 그저 자아 실현의 한 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혼 후에야 깨달았고, 내 삶을 주도하는 것과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댔다.

그래서인지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혼란 속에서 거주지에 대한 고민도 계속됐다.

주거지는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 걸까? 이혼 후 주거지를 옮긴 많은 싱글 맘과 싱글 대디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이 장에서는 이혼으로 인해 이사를 수없이 다니며 겪었던 심경에 대해 돌이켜보려한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생', 역시 인생은 의도했던 대로 살아지지는 않더라.
그러나 그 흘러감에 몸을 맡기다보면,
어느새 기대하지도 않았던 멋진 풍경과 조우할지도 모르는 일일테니.
내 삶이 의도치 않게 변화됐다고 해도, 너무 기죽지는 말자.


나는 현재 수도권의 유명하지 않은, 외곽의 한 중소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강남이나 홍대, 상수, 압구정처럼 핫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감당가능한 집값과 초록초록한 녹색 자연경관이 여유로운 동네라서 거주하기 편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집주소를 말하면 그 사람의 경제적 수준이 짐작됐고,

어느 지역의 어느 단지에 산다고 하면 부러움을 사곤했다.

사실, 우주적 관점에서 내려다본다면,

2024년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 어느 동, 어느 아파트 단지, 로얄층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비슷한 세대를 공유한 인간들일 뿐일 텐데.


그럼에도 이혼 후, 10년 동안 5번의 이사를 다녀본 사람의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거주적 안정성은 삶의 안정성과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불안정하게 이사를 다섯 번이나 다닐 때마다, 내 삶은 방향성을 잃은 작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한 공간에 뿌리를 내려 터를 잡고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가보다.

그래서 사람이 두 다리로 직립보행하고 서 있는 모양이 마치 나무가 산에 뿌리를 내린 모습과도 흡사한 것일까.


그간 내가 거쳐온 지역을 말해보자면,

일단 서울에서는 동작구, 서초구,  양천구, 성북구..정도였다.

20대에서 30대 초반 시절 여기저기 점프도 많이했다. 주로 내가 공부하는 대학이 있는 지역이었는데,

서울에 거주할 때는 5분정도 걸어가면 트리플 역세권 정도는 기본이었고,

유명 대학이나 각종 프렌차이즈 상업 건물들, 극장 등 문화시설, 대형 공원 등이 지척에 있었다.

그 시절에는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 두려움이 밀려와서,

대학 신입생부터 시작된 서울 살이는 결혼을 해서 신혼집을 얻을 때까지 지속됐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휴직을 하면서

이동 범주가 줄어들고, 무엇보다 쾌적함과 안전함이 거주의 제일 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했었다.

트리플 역세권 조건은 있으면 좋겠지만, 유모차와 아기띠를 가지고 지하철 타기란 거의 곡예에 가까웠기에

넓은 주차장을 보유한 교외의 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아이가 유아기일 때는, 학군 따위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맛있는 브런치 식당이나, 아이를 데리고 피크닉을 갈 작은 공원 정도만 있어도 족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앞두게 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양 마음이 조급해졌다.

무언가 최상의 교육환경이 구비된 안정적인 곳에 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기시작했다.

한 발자국 나아가, 이왕이면 신축 아파트에 국민 평수라는 30평대는 되어야 할 것 같았고,

초등 워킹맘으로서 학원 픽업을 하려면, 내 직장과도 거리가 가까워야 했다.


그렇게 지금 사는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코로나 직전, 부동산 버블 시작 즈음 왔으니, 불과 만 3년 정도 지났고, 아이는 어느 정도 학교에 혼자 다닐 수 있을 만큼 동네에 적응을 해갔다.


초등 학부모로 지내다보니, 초등 교과서에는 '우리 동네, 우리 가족' 이런 주제의 수업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 동네의 편의성에 대해 아이들이 네이버 지도의 거리뷰까지 살펴보며 검색한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만약, 부모의 능력 부족으로 아이가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없게 된다면 아이는 그 수업 시간에 얼마나 수치심을 느껴야할까.


사실, 지금 사는 이 집에서 영원히 살 줄 알고 이사를 왔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빠르면 올해 안에, 늦어도 24년 봄 전에는 지금 사는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 동안 브런치에 글도 못 쓸 만큼, 불안정한 거주 상황이 나를 힘들게 했었다.


어른만 있다면 어디는 가서 살겠지만, 아이를 동반한 채 이사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다니던 정든 학원들과, 학교 방과후 프로그램들, 놀이터에서 만나는 동네 친구들과, 가끔 가던 동네 문구점에 단골 미용실까지, 모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부동산에서는 자녀가 있는 고객이 오면, 초,중,고가 모두 가깝다는 내용을 가장 크게 어필한다.

내년 이맘때쯤, 나와 아이는 어디에서 또 뿌리를 내리고 잘 정착하고 있을까?


이번 집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을 때,

내 머리에 문득 스친 생각은, 그럴 바에 아예 외국으로 이사를 해버릴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드 넓은 캐나다의 구글 맵을 켜놓고, 수많은 주의 학교와 공원, 문화시설 등을 검색하면서

알게 된 진실은, 세상은 우리가 선택하여 살기에는 너무나 넓고 다양한 대안이 존재하며,

그저 이 지역, 이 아파트에만 집착하기에는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동네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 이 불안정한 이주를 즐기려한다.

아이의 학교가 바뀐다는 사실은 큰 변화에 속하지만,

그러기에 더 넓은 시야를 갖게되고, 상황에 대한 적응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생"
내가 좋아하는 구데타마의 명언이다.
선택에 결정장애가 있으니, 누가 좀 뽑기라도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때로 인생의 아주 큰 결정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우연히 시작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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