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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Nov 02. 2024

회자 정리, 다시 살고싶다는 의욕

정리가 안 된 방을 생각해보면, 그 너저분함에 진절머리 날 때가 있으시죠? 

하다못해 방 한 칸의 작은 공간이라할지라도 청소와 정리는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물며 우리네 인생은 오죽할까요? 마흔이 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 중 한 가지는, 인생도 지저분해지기 전에 그때그때 정리하며, 재점검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해, 한 해 살아온 시간이 늘어날 수록,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쌓이는 '묵은 때'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 중에서 잔 가지들은 제치고서라도, 내 삶을 뿌리채 흔들리게 하는 '악의 근원'이 있다면 과감하게 도려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 가지가 자라날 수 있고, 우리네 삶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삼십 대 때 격었던 '이혼'이라는 경험이 제가 씩씩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던 요소였습니다. 이혼 후, 오점으로 남은 것만 같았던 30대가 영화 필름 감기듯, 그렇게 쓱-하고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서른 아홉의 저는, 마흔 살이 되면, 청춘도 저물어가고, 내게 남은 희망도 없을 것처럼 두려웠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삼십 대는 안타깝게도 슬픈 상흔을 겪은 불안정한 상태로 오래도록 회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슬픈 상흔을 깨끗이 치료하기 위해,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문학 치료라는 분야가 있는데, 제가 스스로에게 내렸던 처방은 '영화 치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랜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략적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테러범의 총격으로 인해 남편과 아들을 잃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주인공 이디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와이오밍주 어느 외딴 산 속에 있는 오두막에서 핸드폰과 차 없이 세상과 단절하고 혼자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깊은 산 속에서의 자급자족 생활은 여자인 이디 혼자선 무리였고, 어찌저찌 버티다 식량과 장작이 다 떨어진 어느 겨울날, 결국 이디는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때 마침 지나가던 사냥꾼 미겔이 이디를 발견, 미겔은 지극정성으로 이디를 간호해 이디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이후, 미겔은 이디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해주고, 사냥을 비롯해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여러가지를 가르쳐주고, 이런 미겔의 헌신적인 모습에 이디도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출처: 나무위키) 


이 영화의 초반에서 심리 상담사과의 대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기 힘든가요?"
"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대체 왜 그걸 공유해야하나? 어차피 공감 못 할 텐데."
"그럼 혼자 고통 속에 있게 되잖아요." (침묵) 


  이 대화를 끝으로 주인공은 휴대폰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린 채, 세상과 작별하며, 인적이 드문-아니 거의  없다시피 한- 산 중턱의 낡아빠진 통나무 집에서의 은둔 생활을 시작합니다. 영화는 자칫 '리틀 포레스트'를 연상케 하며,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중년의 여성 이야기를 다루는 듯하지만, 여기서 '숲'은 평화로운 공간이 아니라 '야생의 잔혹한 공간'입니다. 잔잔하고 평화롭다기보다는 울창하고 한적하고 고독한 느낌이랄까요? 과연 영화 속 여주인공은 잔혹한 야생 속에서 홀로 잘 살아남았을까요? 그녀의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영화의 초반에서 그녀가 야생 생활을 하면서 번번히 실패하는 모습을 보며, 만약 내가 저 숲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자 혼자 야생에서 살아남는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사람이 없는 곳이라면 범죄의 우려는 없겠지만, '힘의 크기'로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원초적 자연의 세계에서, 누구라도 혼자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려움을 알면서도 최후의 선택으로 사람들을 피해 산 속 깊은 곳에 숨어버린 그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상해 있었을까요? 



  사실 극도로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뒤에는 누구의 위로도 위로가 되질 않습니다. 위로는 아픔을 모르는 사람이 형식적으로 건네는 가식일 뿐,
진짜 슬픔에 공감한다면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같이 옆에 있어주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영화 속 그녀는 우발적 총격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한 순간에 잃었다. 상실의 슬픔에 대하여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차마 그 아픔의 깊이마저 짐작할 수 없습니다. 슬픔이란 녀석은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누군가에겐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큰 것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정도'의 일로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를 비로소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30대의 저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혼이 실패에 대해 스스로를 가혹하게 자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너무나 공평하고 냉혹해서, 누구에게든 불행을 처방합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착실한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의 덫에 쉽게 빠지고 말기도 하거든요.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은 때로는 평생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집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삶은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가슴 속 상처를 안은 채,
언젠가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하루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을 뻔했던 영화 속 주인공이 깊은 숲 속 대자연의 품에서 상처를 치유했듯,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비단 이 영화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얼마든지 불행은 닥쳐올 것이니까요.




나름 인생에서 거대한 불행을 겪어보고 온 몸으로 맞닦드렸었던 경험이 있었던 저로서는,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슬픔과 불행이 있어야, 현재의 권태로운 일상도 감사하게 여길 수 있다고요.
불안하고 허우적대던 30대를 보낸 덕에,
비로소 40대의 중년으로서 마음의 여유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지금 여유롭게 새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적인 안정과 같은 맥락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도 아이와 둘이 헤매고 있고, 여성 혼자 감당하기에는 매 순간 두려운 요소들이 일상 곳곳에 숨겨져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지나간다는 것을 십 년의 시간 속에 배웠기 때문입니다. 



會者定離. 去者必反.


만남에는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불행을 내 손에서 놓아주면, 그 자리에 행복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렇게 인생은 돌고 돕니다. 그래서 살아볼 만한 것도 같습니다. 


'다시 살아갈 의욕', 십 년의 시간이 제게 선물해준 큰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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