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죽기까지 다섯 번이나 죽었다.
밥벌이를 못해 식구들이 굶주려 경제적으로 첫 번째 죽었다. 집 밖으로 돌아다닐 수 없어 이웃이나 친구를 만나지 못했으며 사회적 관계 단절로 두 번째 죽었다. 침대에 누워 대소변도 못 가리고 움직이지 못해 세 번째 죽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주사나 구멍 난 위에 영양을 공급해야 했으며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해 네 번째 죽었다. 숨을 못 쉬고 심장이 뛰지 않아 다섯 번째 죽었다.
내가 운 좋게 집에서 다섯 번째로 죽으면 병원 장례식장, 상조회사 또는 112에 신고하여 구급차를 부른다. 괜히 자연사한 사람을 119에 전화하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 시체검안서(병원)나 검사지휘서(경찰)가 필요하며 사망 절차가 번거로워진다. 사망 후 1달 이내에 주민센터에 사망신고하고, 지자체 장례지원금, 유족연금, 반환일시금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라. 죽은 후 달의 말일로부터 6개월 이내 상속세 신고하는데 안심상속 원스톱서비스 활용하면 재산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거다.
요즘 대부분 병원에서 죽는다. 나이 들어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못 나온다. 치료해 봐야 노인은 피곤하고, 단기 효과만 있을 뿐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들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 돈도 많이 들고 좋은 게 별로 없다. 늙어서 약 많이 안 먹고 싶다. 병원에서 혈액 투석, 신장 치료, 폐렴, 항암 치료, 감염 치료 등 연명치료가 필요하더라도 난 거부하고 싶다. 아버지처럼 자연스럽게 집에서 죽는 운을 누리고 싶다.
태어나 성장한 후 늙고 병들어 죽는다. 친구인 병을 적으로 오인하여 맞서 싸웠더니 기세가 등등해져 더 피곤하다. 사람은 숨이 멎어야 죽는 게 아니다. 삶의 비중이 높아지다가 일정 시점을 지난 후 죽음의 비중이 늘어난다. 죽음은 어둡지만은 않아 슬프지 않다.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가는 길이다. 삶과 죽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공생한다.
죽음이 밝은 색깔이고, 삶은 어둔 색깔인 것 같다. 밝은 색깔의 죽음을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 죽음은 양초처럼 자기를 희생하여 살아있는 것을 유지시키고, 삶은 다른 것들을 죽임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이 태어나면 많은 생물들은 사람의 먹잇감이 되어 죽고, 사람이 죽으면 미생물이 태어난다. 삶은 죽음에 빚지고 있다.
장례는 죽은 자와 남은 자들을 위한 행사다. 죽은 자에게 잘 가라고 배웅하며, 남은 자들은 죽은 자와 정을 끊고, 죽은 자를 떠나보낸 남은 자들이 똘똘 뭉쳐 남은 생을 잘 살도록 격려하는 행사다.
나와 끈끈한 정을 맺은 남은 자들이여 내가 죽었다고 너무 슬퍼 말라. 껄껄 웃으며 즐거웠던 추억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섭섭함이 있을 수 있다. 같이 더 지내면 못해준 것 해줄 수 있고 더 잘해줄 수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다. 자꾸 생각나는 이 모든 것을 잊어라. 훨훨 떠나고 싶다. 어찌 보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며, 욕망과 질병의 고통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지 모르겠다. 삶과 죽음은 각자 자기의 길이 있다. 우리가 바라고 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 있을 때 영정 사진 찍고, 가족 및 친구와 식사한다. 죽기 전에 가족을 다 불러 모아 가족회의를 열고, 인수인계 목록을 전달해 준다. 재산 정리하고 유언장을 쓰거나 녹음한다. 죽기 전 통장에 있는 돈은 한 통장으로 모으고 돈 지출할 때마다 내용을 적는다. 내용 안 적고 지출하면 죽은 후 남은 가족들이 내용 모르는 거래를 소명하느라 고생하고 일정금액 이상은 증여의제로 추정될 수 있다. 신분증, 통장 비밀번호와 카드 주고 이제부터 쓰는 돈은 그 카드로 처리하라고 말해준다. 장례 때 오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지인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싶다.
나는 언제든 없어질 수 있는 존재이므로 ‘살아 있음’과 지금 마주한 ‘현재’가 소중하다. 마치 어린애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다 없어질까 봐 아껴 먹는 모습과 유사하다. 줄어드는 아이스크림 먹기에 바빠 미워할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