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금숙이네 집
금숙이의 꿈은 백댄서였다. 티브이에 나오는 가수가 아닌, 그 가수들 뒤에서 반짝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댄서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 꿈이 우스웠다. 입이 유난히 크고 들창코였지만, 쌍꺼풀이 진 선명한 눈과 긴 속눈썹이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목소리는 허스키했다.
당시 나는 갓난아이 시절부터 살았던 주택을 떠나, 그곳과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맨션’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나는 집에 돌아와 언니나 동생과 시간을 보냈다. 아파트 문은 번호 키가 아니었고 열쇠를 돌려서 여는 방식이었다. 영 낯선 집이었다.
나는 ‘래치키 키즈(latchkey kids : 방과 후에 부모의 보살핌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아이, 열쇠로 스스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다 해서 유래)였다. 간혹 나는 실수로 집 열쇠를 집에 두고 등교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엄마 아빠가 오실 때까지 미련하게(?) 아파트 문 앞에서 몇 시간이고 쭈그리고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열쇠를 집에 놓고 온 터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갑자기 금숙이네 집이 떠올랐다. 금숙이 집은 우리 집과 큰길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금숙이를 몇 번 따라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집을 찾아갔다.
맞은편의 주택가로 들어가면 제법 나무가 많은 정원이 딸린 한옥집이 있었는데 그곳에 금숙이 집이 있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한옥집을 끼고돌아야 그 뒤편에 있던 금숙이네 집이 보였다. 금숙이네는 그 한옥집의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 큰 한옥집에 압도되어 ‘우와~~’했던 나는 그 집을 끼고돌아 작은 집으로 들어갔을 때의 그 아쉬움과 서운함을 기억하고 있다.
금숙이네 집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쿰쿰한 냄새가 났다. 방은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불이 늘 펼쳐져있었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금숙이네 집엘 갔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다른 친구들 2~3명과 함께 였다. 금숙이는 방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부엌으로 내려왔다. 부엌은 신발을 신고 다니던 재래식 부엌이었다.(아궁이가 있는 집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아궁이 대신 ‘곤로’라는 게 있었다.)
“배고프지?”
금숙이는 나무 찬장을 열었다. 그곳에서 김치며 단무지, 나물 같은 것이 접시째 나왔다. 밥솥을 열고 스테인리스 양푼에 밥을 척척 넣었다. 나무 찬장에 꺼내온 김치와 단무지, 김, 나물, 고추장 같은 것을 넣고는 쓱쓱 비벼댔다. 금숙이 집에 들어섰을 때 코끝을 간질이던 그 시큼한 냄새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많이 해본 솜씨였다. 집에 돌아오면 금숙이나 나나 집에 아무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금숙이는 혼자 양푼 비빔밥도 만들어 먹고, 티브이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금숙이가 비빈 비빔밥은 좀 엉성해 보이긴 했다. 비빔밥에서 좀 시큼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시간은 오후 5시에 가까워진 시각.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금에야 간식이 넘쳐날 지경이지만 그때는 딱히 간식이랄 게 없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맛! 무슨 맛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시큼한 그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양푼 비빔밥은 어쩌면 우리들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줬다.
밥을 먹고 나면 이불 위에 엎드려 이야기를 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등의 무성한 소문들과 2차 성징으로 인한 당황스러운 신체 변화, 브래지어를 언제 착용해야 할지 등의 고민상담 등 사소하고 은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마당으로 나와 고무줄놀이도 하고, 팔방 치기를 했다. 그 집에는 큰 나무가 많았다. 마당 한 구석에 앉아 좀 쉬고 있으면 큰 나무들이 마치 하늘처럼 느껴졌다. 집은 서늘했고 살짝 어두웠다.
나는 그 한옥집이 궁금했다. 대청이 있고 쪽마루가 있는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 장지문이 한 면을 채우고 있던 묘한 집이었다. 입구가 어디인지도 잘 몰랐다. 실컷 놀다가 ‘꾸러기’(1986년~1988년도 mbc에서 방영했던 어린이 드라마)를 할 시간이 되면 나는 책가방을 메고 그 집을 나왔다. 엄마나 아빠 중 한 분은 집에 돌아오셨을 시간이었다. 도어록의 마법이 풀릴 시간. 그 조용한 큰 집에 금숙이를 혼자 남겨두고 나는 손을 흔들고 큰길을 냅다 뛰어갔다. 금숙이는 방에 들어가 혼자서 ‘꾸러기’를 보았을 것이다.
어린 소녀들이 셋방살이에 대해서 뭘 알았을까. 그 뒤로도 나는 도어록의 마법이 걸리거나 그냥 혹은 심심하거나 또는 시큼한 비빔밥이 생각날 때는 금숙이네 집에 놀러 갔다. 그 한옥집과 마당과 큰 나무들이 있는 그곳은 우리들의 비밀의 정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한옥집을 끼고 뒤로 돌아 작은 집으로 들아가 고단한 몸을 뉘었을 금숙이 엄마와 아빠.(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나무 찬장에서 꺼낸 차가운 반찬들로 밥을 비벼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백댄서를 꿈꾸었던 나의 친구 금숙이를 이제야 애틋한 마음으로 추억한다.
이제 우리는 모두 셋방살이가 무엇인지 알고도 넘을 나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