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인경이네 집
‘올림픽 신발.’ 그 친구네 신발 가게 이름이었다. 당시 88년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어서, 온 나라가 ‘핸드 인 핸드’ (88 올림픽 주제가)를 부르며 올림픽 신드롬에 빠져 있을 때였다. 프랜차이즈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올림픽 신발’은 아마 그 친구의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상호가 아니었을까 싶다.
친구 이름은 조인경이었다. 키가 작고 빼빼했지만 목소리는 우렁찼고 웃음소리도 호방했다. 귀여운 얼굴에 장난기가 많았지만 누구보다 똑똑했다. 고무줄을 자르고 도망가는 남학생을 기어이 쫓아가 한 대 때려주는 당찬 친구이기도 했다. 선생님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던 인경이는 6학년 때 전교 학생회장에 뽑혔다.
당시 내가 살던 소도시에서는 부모님의 직업이 대부분 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던 용지에는 부모님 직업이나 집안의 재력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여러 문항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이 있는지, 자동차가 있는지 등등을 물어보는,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호구조사)이 있었다. 당시 집에 자가용이 있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 컬러텔레비전만 있어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때는 ‘가정방문’이라는 걸 했다. 선생님들은 가정방문을 다니며 부모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부모님들은 맛있는 간식을 준비하고 집을 청결히 했으며 옷도 가장 번듯한 것으로 챙겨놓았다. (이해하시라. 이 때는 80년대였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당당했던 인경이. 우리들은 인경이 아빠가 선생님이거나 회사원이나 교수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가장 좋은 직업으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딱 그 정도였다. 인경이는 당당하게 ‘우리 아빠는 신발가게 하셔’라고 말했다.
인경이의 ‘올림픽 신발’은 우리 집에서 슈퍼마켓으로 가는 길 도중에 있어서, 자주 지나치곤 했다. 신발을 사러 가기도 했다. 인경이를 따라서 인경이 집에 몇 번 놀러 가기도 했다. 신발 가게를 들어서면 새 고무 냄새가 훅 달려들었다. 가게에 들어가면 그 안에 딸린 방이 있었다. 나무 유리문이었던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면 그곳이 인경이 집이었다. 인경이 집은 단칸방이었다. 그곳에 텔레비전도 있고 책상도 있었다. 인경이는 위로는 오빠가 있었고 밑으로 여동생이 있었다. 나는 그 작은 방에 어떻게 다섯 명이 밥을 먹고 잡을 자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어느 날인가 인경이네 집에 놀러 갔더니 마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칠 무렵이어서 나는 방 한 구석에 얌전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인경이네 집 부엌을 가려면 방을 나와 옆에 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했다. 혹은 방 뒤편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을 통해 부엌도 가고 화장실도 갔던 것 같다.
내가 어쩌다 인경이네 부엌에 갔는지 그 앞뒤 상황은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나는 인경이네 부엌에 있었다. 부엌이라고는 하지만 요즘과 같은 부엌이 아니라, 시멘트 벽 한쪽에 가스레인지와 찬장, 냉장고 등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 입식 부엌이었다. 벽과 싱크대 사이의 좁은 틈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인경이 어머니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웠다.
인경이도 체구가 작았고 오빠도 작았으며 아빠도 작았다. 아빠는 인자하면서도 엄했다. 그리고 유머가 있었다. 내가 밥을 먹고 왔다는 그 말에 인경이 아빠는 아쉬운 표정을, 인경이 엄마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인경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오빠와 동생과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밥을 먹었다. 우리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밥 먹으면서 떠들고 웃는 게 아니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고 자랐던가. 인경이 아빠는 식사를 다 마치고 잠시 어딜 다녀오시더니 검은 비닐봉지에서 뭔가를 건네주셨다.
‘옜다. 아이스께끼 하나 먹어라.’
인경이 아빠는 자신의 집에 온 딸의 친구에게 뭐라도 먹이고 싶었던 거다. 아이스크림이 아닌 아이스께끼.
나는 가끔씩 인경이의 신발을 유심히 보곤 했다. 인경이의 신발은 늘 새 신발이었다. 신고 싶다면 아빠가 그냥 신게 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별로 신고 싶은 신발이 없다고 했다. 다섯 명의 가족이 모의를 하듯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시끌벅적하게 밥을 먹으며 (‘응팔’의 덕선이네 가족이 생각나는 풍경. 하지만 인경이네 집은 덕선이네 집보다 작았다) 신발을 신고 벗으며 부엌과 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반찬과 국 등을 더 나르던 인경이 엄마. 그런 것들이 질서를 이루며 묘하게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운동화 가게 깊은 곳에 그렇게 오밀조밀한 가족들이 있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밥을 먹고 나면 인경이 아빠는 신발을 신고 가게로 나와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손님이 오면 이것저것 신발을 골라주고 구둣주걱을 건네며 한번 신어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 사지 않고 가면, 신어보기만 했던 흩어진 신발들과 상자들을 정리했다.
인경이는 중학교에 올라간 뒤 1년도 안되어 고향을 떠났다. 올림픽 신발도 문을 닫았다. 인경이 오빠와 동생도 모두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다. 키가 작았던 다섯 명의 가족.
인경이 아빠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을 것이다. 인경이가 서울의 어떤 집으로 이사를 갔는지, 여전히 신발가게를 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중학교에 올라가며 서로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1학기도 채 마치지 않고 서울로 전학 갔다는 이야기만 풍문처럼 들었다. 더 큰 도시에서 총명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인경이 아빠가 꿈꿨던 올림픽. 인경이와 형제들은 아빠의 바람대로 금메달을 거머쥐었을까.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인경이 아빠만큼은 금메달감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