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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25. 2019

누군가의 우주가 된다는 것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홉 살인 첫째 봄이는 폐렴에 걸렸다. 지난주 화요일부터 아프더니 벌써 5일째 학교에 못 가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어제 겨우 퇴원했지만 아직 병이 나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리에 누워 있고, 하루 종일 죽 몇 숟가락을 먹는 게 식사의 전부다. 열이 내린 게 그나마 다행이다. 내일이 벌써 수요일인데, 학교에 갈 정도로 기운을 차리려면 며칠이 걸릴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독하디 독한 병에 걸린 것 같다.     


 일곱 살인 둘째 별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별이네 반 이름은 ‘밝은 미소반’이다. 미소반 친구는 겨우 네 명이다. 주는 걷지 못하고 원이는 말을 잘 못한다. 서준이와 별이는 잘 웃고 잘 얘기하지만 수업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어렵다. 근위축증, 자폐증, 뇌병변, 지적장애. 각자 다른 이름의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해맑게 웃는다.     


 누나의 갑작스러운 입원은 불안이 높은 별이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집에 있어야 할 엄마는 늘 병원에 있고, 낯선 작은 방 안에서 누나는 항상 누워있다. 누나의 손목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 있는데, 가끔씩 간호사 선생님이 나타나 누나의 손에 달린 긴 줄에 주삿바늘을 꽂는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별이는 자신이 아닌 누나가 주사를 맞고 있기에 안심을 한다. 밤에는 엄마가 별이를 데리고 집에 가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없을 것을 안다. 엄마는 누나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잠든 별이를 아빠에게 맡기고 누나의 병실로 돌아올 것이다.    


 오늘 별이의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누나의 입원기간 중 많이 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지냈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유치원에서 별이의 문제행동이  도드라졌다는 것이다. 불안이 높아지거나 감각이 예민해지면 튀어나오는 갖가지 행동들이 있다. 감각통합 장애가 있거나 자폐 스펙트럼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다. 예전에는 갑자기 발을 구르기도 하고, 소리를 꽥 질렀던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눈을 질끈 감다가 눈꺼풀을 자꾸 꼬집듯이 만졌다고 했다. 무엇을 보기 싫어서 그랬을까. 회피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것이 별이에게 있었나 보다. 유치원에서 금요일부터 그런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였는데, 오늘은 결국 눈 위에 멍이 들 정도로 자기 눈을 세게 만졌다고 한다. 선생님이 개입하셔서 그만 두기는 했지만, 집에 돌아온 별이의 양쪽 눈꺼풀에 세로로 살짝 피멍이 들어 있었다.    


 집에서는 별다른 점이 없었기에 별이의 불안을 간과했던 내 책임이다. 하지만 대안은 없었다. 아픈 누나에게는 엄마가 필요했다. 봄이도 이제 겨우 아홉 살. 입원한 기간 동안, 별이를 재우러 집에 갔던 두 시간 사이 봄이는 보통 잠이 들었다. 밤 12시가 다 되어 병실에 들어가면 봄이는 눈을 반짝 떴다. “엄마, 보고 싶었어. 꼭 안아 줘.” 아이는 그 두 시간 동안 꼬박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잠이 들었어도 엄마가 그리웠던 것이다. 봄이는 생애 첫 입원을 했다. 폐렴은 봄이도 나도 처음 겪어보는 병이었다. 열이 무섭게 났고 그 뒤에는 하루 종일 기침을 했다. 끊임없이 가래가 나왔다. 가래를 뱉느라 하루에 갑 티슈 한통을 다 썼다. 아이는 입맛을 잃었고, 초롱초롱하던 눈빛도 점점 허공을 응시했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져서 자꾸 울었다. 주사 꽂은 손이 아프다고 울고, 호흡기 치료할 때 코가 따끔거린다고 울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엉엉 울고 퇴원한 후에도 다시 뛰어놀고 싶은데 몸이 너무 힘들다고 또 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끔 별이의 치료 때문에 아픈 봄이를 할머니께 맡길 때도 있었다. 겨우 한두 시간인데도 봄이는 그 시간을 힘들어했다.     


예전에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나와 같은 세대의 드라마라 재미있게 봤었다. 오래전 작품이라 자세한 스토리는 잘 기억 안 나지만, 유독 기억나는 대사가 있다. 등장인물 중 의대생이 있었는데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의 아이에 대해 나눴던 이야기이다. 아이가 아홉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 나이 때의 아이에게는 엄마가 우주잖아. 우주가 사라지는 거지. 저 애에겐.”    


 결혼 전 20대와 30대 사이에 나는 유달리 외로움을 많이 탔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었지만 늘 외로웠다. 고시 공부를 오래 했고, 남들보다 사회에 나오는 시기가 늦었다. 불안과 우울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세상에 나 하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들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만 같은 자리에 뒤 쳐 저 있는 패배감이었다. 그때는 참 세상을 살기가 싫었었다. 모든 것이 귀찮고 하기 싫었다. 누군가가 어느 날 나에게 다가와서 ‘이제 그만 나와 같이 가자,’라고 말하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버릴 수 있다고 매일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을 낳아서 누군가의 우주가 되었다.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낼 의무가 생겼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사라져 버리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엄마는 아파도 안되고, 다쳐도 안된다. 죽으면 더욱 안된다.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고되고 부담스럽고 힘들기도 하지만, 벅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언젠가 우리 애들도 저 혼자 큰 줄 알고 엄마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특히 별이에게는 더 오랫동안 내가 필요할 것이다. 엄마바라기 별이에게 나는 대체 불가의 존재다. 그래서 참 힘들지만, 그게 또 묘한 쾌감을 주기도 한다. 내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아마도 그런 복잡하고 알 수 없는 내 마음속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모성애라고 부르는 것 같다.    


 아이들은 이제 둘 다 잠이 들었다. 봄이가 아픈 몸으로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보니 낮에는 노트북을 열 엄두가 안 난다. 다른 곳으로 시선이 향해 있는 엄마의 옆얼굴을 보는 것은 아이에게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별이도 “엄마!!” 하며 품에 쏘옥 안긴다. 그렇게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며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밤이 되어서야 겨우 내 시간이 생긴다. 자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자꾸 밑도 끝도 없이 다짐 같은 걸 하게 된다. 엄마가 지켜줄게. 너희는 걱정하지 마. 나라는 사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이런 나에게 찾아와서 우주라고 해주는(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우주처럼 한없이 신뢰하고 의지해주는 작은 생명체들이 있어서 한없이 기쁘다. 삶의 뒷 페이지에 이런 감동이 숨겨져 있을 줄 그때에는 미처 몰랐다. 내가 누군가의 우주가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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