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정말 괴롭지 않았을까?
저, 나아지고 있나요?
병원을 이렇게 오래 다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 잔병치레가 많았던 터라 병원을 자주 가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고, 약 먹는 것을 꺼리는 편이기도 했다.
남편 손에 이끌려 간 첫 진료에서 나는 내가 병원에 왔어야 했다는 것을 바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병원에 왔으니, 이제 나아져야 할 터였다.
주 1회 가던 진료를 2달 뒤, 2주에 1회 가는 것으로 변경하였을 때에는 아 이제 나아지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면 금방 나아지겠구나.
그러나 초반의 강렬한 심적 고통에서만 벗어났을 뿐, 불안과 우울은 잦아지지 않았다.
어떤 기간엔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는 것 같은 나날들도 있었다.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하루 뒤에는 두 걸음 후퇴하는 것 같은 하루가 이어졌다.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일까요?
조금 나아지는 거 같으면 금세 다시 악화되어요.
나의 이야기를 놀랍지도 않게 듣고 있던 의사 선생님은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상향 하면서 완벽히 나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말고 다른 활동으로 리프레시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해서 없앤다.
불안과 강박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극에 달해서 결국 나에게 온 우울.
나는 이 모든 것을 문제로 인식했고, 문제이기에 해결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되지!', 하지만 이 질병은 해결 방법을 명확히 할 수 없었다.
약을 먹는다고 온전히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른다고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괜찮았지만, 어느 날은 끔찍한 우울과 불안감에 허우적거렸다.
이대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근본적인 원인인 나의 성향을 당장 바꿀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당장 이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회사부터 옮기겠다 선언했다.
회사라도 옮기면 당장의 문제가 해소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해볼 만하다 생각하는 일+가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회사가 있으면 우선 서류부터 지원했다.
그리고 불합격을 받으면 새로이 불안해졌다.
나 지금 뭔가 부족한가 보다, 뭐지? 내가 지금 어떤 역량을 더 쌓아야 하지?
내가 기획자로서 필요한 모든 역량을 완벽히 갖춘 기획자도 아닐 것이고 회사마다 그 시기에 따라서 필요한 인력도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불합격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길어진 신사업 준비 기간으로 인해 커리어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던 나였기에 내가 우려한 대로 기획자로서 그동안 내가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 깊이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하지만 사실, 합격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서류 전형에 합격하고 면접 전형의 일정을 제안하는 회사들도 있었다.
그럼 다시 또 급 머리와 마음이 냉정해졌다.
이 회사는 내가 정말 바라는 방향이 맞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맞아? 이 회사를 가면 그다음에 나는 어떤 기획자로 성장하게 되는 거지?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다시 또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의 가치도 올라갔다. 혹은, 그냥 그런 판단을 내린 날들이 나의 불안이 잠시 잦아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날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지만..."으로 시작하는 전형 중단 요청의 회신을 보내는 나날들도 있었다.
그러니 결국, 불합격을 하든 합격을 하든 나의 불안과 불만, 답답함은 지속되었다.
서류 지원 이후 불합격에는 좌절하고, 합격한 회사로는 전형 중단 요청 메일을 보내고를 2-3번 반복하는 날 보면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묻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 이제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내가 길을 잃은 기분이 들어. 뭐를 향해서 가야 하는 거지?
항상 '성장'을 추구해 왔고, 그것이 나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완벽함만을 쫓으며,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스스로를 나무라는 내가 있었을 뿐이었다.
여러 번의 이직을 거치며 언젠가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런 경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그 경험들을 거치면서 이직하는 중이야.
이 정도면 생각했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인생이 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괴롭지 않은 걸까?
사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고 계획대로 흘러갔다면(내가 이 회사에서 신사업을 바로 승인받고, 센터 내의 신규 입사자들이 서로를 험담하지 않고 협동적으로 일했다면) 나는 병원을 가지 않았을까?
아니, 계획대로 흘러갔다 해도 나는 언젠가 병원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내가 병원을 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새로 입사한 옆 팀 신규 입사자들 간의 분쟁과 험담, 그로 인해 받는 업무적/정신적 피해로 인해서 내가 병원에 가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래서 뒤따라오는 분노도 꽤나 컸다.
내가 왜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왜 이런 상황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이직 준비를 하면서도 내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분노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합격/불합격, 그 어떤 상황도 마음에 들 수 없었다.
내가 계획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병원에 온 것은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의 성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시점은 아주 아주 먼 뒤의 시점, 실제 이직을 하고 새로운 회사를 다니며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깨달은 것이었다.
내가 병원에 온 이유는 스스로를 돌볼 줄 몰랐기 때문,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부딪힐 일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성장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서 조급해지는 시점 혹은,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를 채찍질하다가 마음이 부수어지는 시점은 이때가 아니어도 분명 일어났을 일이었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도, 내가 나를 다룰 줄 모른다면 결국은 똑같은 괴로움을 마주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 당시의 상황과 나를 괴롭게 했던 대상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물론 그 경험이 괴로웠던 것은 사실이고 다시 웃으며 만나고 싶지 않은 대상도 많지만, 최소한 내가 병원에 간 이유는 그 경험 때문이 아니다.
나의 불안은 결국 내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