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과 <폭싹 속았수다>의 영범이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받은 적도 한 번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차근차근 뜯어보고 있었으리라. 한때 자신을 매혹했던 얼굴의 잔해를 찾아보려고 말이다.
- 109p. 민음사
오늘 앤을 만나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마음,
아니 어쩌면 끝내 스스로 판단하지 않은 채 상황에 자신을 맡겨버린 듯한 그녀의 태도마저도 안쓰러웠다.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를 떠나버린 여자.
그러나 완전히 떠나지도 못할 거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그런 처지가 되어버린 앤.
앤을 읽다 보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영범이가 떠올랐다.
그는 결국 금명이를 놓아준다. 두 사람은 분명 순수하게 사랑했지만,
영범이의 어머니는 그 사랑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끝내 이별로 몰아넣고 만다.
그렇지만 금명이를 놓아준 순간은, 결과적으로 영범이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가 금명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기에, 이 둘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나는 정말 많이 울었다.
앤은 프레더릭을 사랑했다. 분명히.
하지만 그 사랑은 그녀가 믿어도 되는 감정이었을까.
주변의 시선, 가문의 기대, 여성에게 요구되는 신중함과 계산 앞에서
앤은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그녀는 떠난다.
떠났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단호해 보이지만, 실은 완전히 떠나지 못한 채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사랑을 접은 것이 아니라, 판단을 유예한 채로 살아온 셈이다.
그래서 앤의 현재는 늘 과거를 향해 있다.
프레더릭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과 함께, 그때 선택하지 못했던 시간들까지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확인하려 한다.
영범이도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사랑은 순수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둘러싼 '가족'이라는 이름의 세계였다.
영범이의 어머니는 그 관계를 용납하지 않았고, 영범이는 끝내 그 세계와 맞서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장면을 ‘어쩔 수 없는 이별’로 받아들이지만, 실은 그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다.
사랑을 버린 선택이 아니라, 갈등을 감당하지 않겠다는 선택.
자신의 인생을 직접 책임지는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선 선택이었다.
그래서 영범이는 끝내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는 계속 살아가지만, 그 삶은 어딘가 비어 있다.
아마도 그는 수없이 후회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조금만 더 자신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리고 그 후회가 깊어질수록, 그는 어머니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린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앤과 영범이는 모두 타인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사람들이다.
그 목소리에 설득당했고, 그 설득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들이 가엾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사랑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선택권을 타인에게 넘겨주었고,
그 대가를 아주 오랫동안 혼자 감당하며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앤의 침묵과 영범이의 체념은 닮아 있다.
둘 다 겁이 많다. 책임을 너무 무겁게 느꼈다.
허나, 자기 인생조차 책임질 용기가 없다면 과연 무엇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삶이라면 평생 변명으로만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