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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23. 2021

김밥 살리기 프로젝트

  알아주는 김밥 덕후다. 자취를 할 때도, 고시 공부를 할 때도 점심은 늘 '김밥'이었다. 간편하고 무엇보다 맛이 있는 김밥은 주린 배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면서부터 언젠간 꼭 한번 김밥을 싸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워낙 좋아하는 메뉴인 데다가 '도시락=김밥'이라는 로망을 실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요리를 시작하면서부터 챙겨보게 된 유튜브 채널에서도 수시로 '김밥'을 도시락 메뉴로 추천했다. 각 잡고 만들지 않아도 김과 밥, 그리고 안에 들어갈 재료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기 때문이리라. 진미채 김밥, 회오리 김밥, 참치김밥, 치즈김밥, 접는 김밥, 그리고 제육볶음 김밥 등 수많은 김밥 메뉴는 나를 유혹했다. 한 번 해봐, 도시락엔 김밥을 담아가야 제맛이지, 하고.


  하지만 실제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통근 거리가 길어 왕복 4~5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것도 힘든 일인데 김밥은 전날 만들어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당일 아침 새벽부터 준비해서, 갓 지은 밥으로 싸야지만 상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김밥을 싸 간다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힘든 미션이었던 것이다. 꼭 한 번 먹고 싶지만,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그런 메뉴였던 것이다. 김밥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 미련이 남았다.

한 번은 꿩 대신 닭으로 주먹밥을 싸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좋아하는 참치마요 주먹밥이었는데 전날 미리 도시락 통에 담아 놓고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래, 김밥이 아니면 주먹밥도 괜찮아, 이번에 성공하면 미소 장국도 끓여 가야지, 하며 설렌 마음을 부여잡고 그 다음날 맞이한 점심시간. 난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레인지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주먹밥은 이미 '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딱딱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주먹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생각했다. 그래, 김밥이든 주먹밥이든 남들이 다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닌 건 아닌 거야. 포기하자,라고.


  한동안 얌전히 지내고 있던 나를 유튜브 채널 영상은 계속 들쑤셨다. 채널 주인은 워킹맘으로 주로 간단히 쌀 수 있는 도시락 메뉴를 만들어 올려 주었는데 하필이면 좋아하는 김밥 메뉴를 또, 올린 것이다. 매콤하게 양념한 어묵에 청양고추를 잔뜩 넣은 어묵김밥. 영상을 한참 돌려보다가 결심했다.


그래, 만들어보자. 만들어서 한 번 가보자!


  아직 매운 것을 먹이지 않는 딸은 간장 양념으로, 나는 매콤한 고춧가루 양념으로 나누어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 김밥을 쌌다. 고슬고슬한 밥과 참기름, 그리고 맛소금과 통깨를 휘휘 두르고 주걱으로 잘 저어 완성한 밥을 김 위에 얹어 돌돌 말면 끝. 너무나도 간단한 어묵김밥은 맛도 좋았다. 김밥 하나 먹고 국물 한 입 떠먹는 게, 특별할 것 없는 이 밥상이 참 좋았다.


  남편도 맛있다 칭찬한 이 김밥을, 이 느낌을 그대로 도시락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점심시간이 훨씬 행복해질 텐데. 어떻게 하면 냉장고에 들어갔다 와도 딱딱하지 않은 김밥을 만들 수 있을까.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냉장고 김밥 데우기', '냉장고 김밥', '먹다 남은 김밥' 따위의 검색어를 번갈아 치며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하나같이 추천하는 방법은 김밥에 계란 물을 입혀 부쳐 먹는 방법뿐이었다. 이미 속재료와 밥이 차가워졌기 때문에 계란에 부쳐 전처럼 먹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란다.


  그런데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김밥전을 부친다? 아예 김밥을 싸가지 않는 게 나았다. 어떤 글에서는 '전자레인지' 대신에 '에어 프라이기'를 활용하라고 하는데, 회사에 '에어 프라이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좀 더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주부 구단, 요리의 달인인 엄마에게 슬쩍 도움을 요청했다.


- 엄마, 먹다 남은 김밥을 도시락으로 싸가려고 하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가 왔다.


"김밥은 딱딱해져서 안 돼. 그냥 계란물에 부치는 수밖에는 없어. 김밥 같은 건 사서 먹어. 그게 나아."



  원하지 않는 대답이 잔소리와 함께 이어져 돌아왔다. 까짓 거 편의점 김밥 2,500원 밖에 하지 않는 걸 사서 먹으면 그만이긴 하다. 훨씬 효율적이고 실패 확률도 낮다. 하지만 내가 원한 것은 그 짜릿하고도 자극적인 맛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내 손으로 만든, 집에서 만든 김밥이다.


  성격 상 한 번 하기로 한 것은 어떻게든 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싼 김밥을, 그다음 날 회사에서 맛있게 먹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알아서 하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전화를 끊은 후 다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한참이 지났을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추천하는 게시글을 발견하게 됐다. 요지는, 김밥 위에 랩을 씌운 후, 소주잔에 물을 담아 같이 돌린다는 것! 시간은 1분 20초 정도가 적당했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오!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흔히 대부분의 음식은 전자레인지를 이용해 데우면 수분이 많이 날아간다. 그런데 그 수분을 대신 날려줄 수 있는 물을 같이 넣어주면? 김밥의 수분이 뺏기지 않게 랩을 씌우면? 그러면 딱딱하지 않은 김밥을 먹을 수 있을 터였다.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작은 도시락 통에 김밥 두 줄을 담고, 소주잔을 대신할 수 있는 종지를 준비했다. 랩은 부담이 되어 과감히 생략하고선 기도했다. 제발, 제발! 이 김밥 살리기 프로젝트(?)를 성공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다음 날, 점심시간.

누구보다도 비장하게 도시락 통에 담긴 김밥과 함께 종지에 물을 담아 1분 20초를 설정하고 '시작'을 눌렀다.

'위이이이잉' 하고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보며 생각했다.


될까? 안 될까? 주먹밥처럼 딱딱하면 진짜 어떡하지? 김밥은 영원히 도시락으로 쌀 수 없는 것인가? 설령 실패하더라도,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에 '띠-'하고 전자레인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다 됐어, 이제 먹어볼 차례야,라고.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럽게 휴게실로 가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결과는


공!


  정말이지 꿀팁이었다.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으며 어제 먹었던 감칠맛이 그대로 재현됐다. 매콤한 어묵과 청양고추의 알싸한 맛이 입안을 휘감다 부드럽게 내려갔다. 볼품없는 모양새와 다르게 맛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제 '김밥'도 도시락 메뉴가 될 수 있겠단 생각에 정말 황홀했다.


저! 이제! 김밥! 도시락으로 싸갈 수! 있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도시락 사진을 남편에게 전송하며, 내일부터는 갖가지 종류의 김밥을 싸가겠노라고, 김밥에 어울리는 도시락 용기를 사야겠다고 하자, 남편은 그저 웃어주었다.




  사실 굳이 김밥을 싸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도시락 메뉴로 할 만한 것들은 수없이 많고 많다. 그중에 '꼭' 김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김밥을 먹어서 행복하냐고,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맞다.

정말 좋아하는 메뉴를 직장에서 먹을 때의 행복함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특히 모두가 안 된다고, 안 될 것이라고 포기했던 메뉴를 성공했을 때의 그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고생해가면서까지 도시락을 싸는 게 오히려 더 힘들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도시락을 싸기로 결심한 순간 힘듦과 수고로움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걸리적거리는 도시락통을 5시간 넘게 들고 다니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원하는 것을 내 힘으로 만들어 먹는 것의 즐거움이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해 준다. 나는 앞으로 계속 김밥을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기뻐진다. 행복해진다. 그거면 충분하다.


  평생 남들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만약에 이번에도 ‘안 되겠지,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걸 내가 무슨 수로 살려.’라고 생각했다면 이토록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없었을 것이다.


고로, 나는 꾸준히 김밥을 싸 갈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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