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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14. 2021

비빔밥 어때요?

죽어가는 것들에게 새 생명을

‘아. 이거 쉬겠다.’


  느낌이 왔다. 엊그제 싸 온 ‘새송이버섯볶음’이 며칠이 지나면 쉬어버릴 것 같은 경계에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버렸을 텐데 막상 요리를 시작하고 반찬을 직접 만들다 보니 쉽게 버릴 수 없었다. 품이 들어간 내 새끼들을 버리기 전에 알뜰하게 먹어주는 것. 요리를 시작한 후부터의 습관이다.


  사실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면서부터 의도적으로 나물 반찬을 많이 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초딩입맛인 나는, 아무래도 좋아하는 돈가스, 소시지, 햄만 반찬으로 싸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건강을 생각하며 요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철 나물을 사서 직접 만들어 먹게 된 것이다. 물론 나물은 맛도 좋고 향도 좋았지만 생각보다 금방 상해버려 늘 곤란했다.


  특히 내가 자주 해 먹는 간편한 콩나물 무침과 새송이버섯볶음은, 바로 해서 먹으면 너무나 맛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칠맛이 떨어지곤 했다. 적은 양을 자주 만들어 먹으면 좋지만, 퇴근해서 매일매일 반찬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 며칠 전, 대용량으로 잔뜩 만들어 두었는데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맛을 되살려 먹을 수 있을까.


  그때 문득, 비빔밥이 생각났다. 각종 나물을 잔뜩 넣은 양푼에 고추장 한 스푼 푹 담고, 참기름 두어 바퀴 두른 비빔밥. 계란 프라이는 꼭 반숙, 써니사이드업으로 해 얹어야 제맛인 그것! 냉장고 파먹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그 비빔밥 말이다! 비빔밥이라면 분명히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잠들어가고 있던 나의 밑반찬들을.


  그런데 냉장고 문을 열려는 찰나, 망설임이 앞섰다. 손이 많이 가지 않을까, 재료가 다 있기는 한가?, SNS나 유튜브를 보면 다들 예쁘게 담던데 나는 그런 재주가 없는데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연이어 나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누굴 보여줄 도시락도 아니면서 스스로 검열하고 기준을 세워 들들 볶는 나를 발견하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내가 먹을 거다, 동료들과 나눠 먹을 것도 아니다, 그냥 편하게 만들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저하다간 아예 하지 않을 것 같아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까짓 거 양푼 대신엔 꼭 맞는 도시락통에 담으면 되고, 오색 나물 아니어도 집에 있는 것들을 차곡차곡 담아가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마침 냉장고엔 수명을 다해가는 새송이버섯볶음과 콩나물 무침이 있었다. 야채칸을 뒤적여보니 애호박과 당근, 치커리와 계란이 있어 얼추 구색을 맞추기엔 충분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어렵지 않고, 손이 많이 가지 않으며, 내 입맛에 꼭 맞는, 나의 '비빔밥' 만들기를.


  당근과 호박을 적당한 크기로 채 썰어 팬에 넣는다. 약간의 감칠맛을 위해 소금을 둘러 숨이 살짝 죽을 때까지 볶으면 된다. 다른 재료가 없어도 볶은 당근은 꼭 준비하는 게 좋다. 기름을 만난 당근은 생당근 이상으로 맛이 좋다. 아삭함을 살리기 위해 넣을 치커리를 깨끗이 씻어 놓는다. 아쉽게도 갓 지은 밥이 없어 냉동밥을 해동해  욱여넣고, 나머지 칸엔 칸칸이 반찬들을 담아본다. 마지막으로 계란 프라이. 예전엔 무조건 반숙이었지만 요새는 완숙으로 잘 익힌 게 좋다. 앞뒤로 노릇하게 구운 계란 프라이가 밥을 감싸니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오! 그럴싸하다. 참, 참기름은 미리 밥에 뿌려두면 맛이 덜 하니 아기 약통에 넣어 가면 딱 알맞다. 일전에 회사 냉장고에 넣어둔 볶음 고추장이 부족할 수 있으니 하나 더 챙겨가면, 점심 도시락 준비, 끝!


  전날 밤부터 설렜다.

  소풍 전 날 밤처럼, 남자 친구와의 첫 데이트 날처럼, 그렇게 설렜다. 어떤 맛일까, 아니 엄청 맛있겠지, 이미 아는 맛이 원래 무서운 법. 맛을 상상하다, 침을 흘리다, 난생처음 얼른 회사를 가고 싶다 생각하며,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

  동료들과 헤어지고 휴게실로 들어가 꺼낸 비빔밥은 어제저녁과 같은 모습이었다. 군침이 돌았다. 얼른 참기름을 두르고, 고추장을 양껏 넣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 성공 대 만족.

  아삭아삭한 식감, 고추장의 알싸한 매운맛과 계란 프라이, 참기름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데다 볶은 야채의 감칠맛이 더해지고, 치커리의 아삭함이 살아있어 그야말로 최고였다. 게다가 회사에서 이렇게나 맛 좋은 비빔밥이라니!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보통 회사 구내식당에 늦게 내려가면, 비빔밥의 각종 고명은 거의 바닥을 보였다. 고추장도 초고추장 맛이 나는 데다(안에 참깨가 들어가 있어 뭐지? 싶은 적도 있다), 참기름은 따로 없어 맛이 별로 였던 적이 많다. 게다가 좀 더 담아 가고 싶어도 뒷사람 눈치를 보게 되어 양껏 가져가지 못한 적도 많다. 그런데 나의 '비빔밥'은 딱 알맞았다. 심지어 고기가 없어도 충분했다. 오히려 먹고 나서 속이 더 편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다 보니 금세 사라지는 게 아까워 한 숟갈, 한 숟갈 천천히 꼭꼭 십어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음번에도 비빔밥 '너'로 정했다고!




  텅 빈 도시락을 에코백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가기 싫던 회사를 가게 하는 힘이 '돈'이 아니라 '도시락'에 있다는 게 웃기기도 했고,

  입 짧은 내가 이렇게 밥을 다 먹은 적이 얼마나 됐나 싶어 새삼 놀라기도 했으며,

  '행복'하단 감정은 의외로 되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에 사뭇 진지해지기도 했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비빔밥이 맛있었던 건 특별한 이유가 없다. 나는 손맛이 좋지도 않은 데다, 밥은 냉동밥을 해동한 거라 딱딱한 부분도 많았고, 반찬들 중 일부는 맛이 가기 직전이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요리조리 조합했을 뿐이다. 내 노력이 들어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편하게 쌌을 뿐. 굳이 고르자면, 그저 '편하게',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내 맘대로 만들어서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볼품없어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시선'과 '평가'를 내려놓고 정말 편하게, 만들고, 먹어서가 아닐까.


  타인에게 보이는 게 많은 세상이다.

  보이는 것으로 타인을 평가하기 쉬운 세상이다.


  하지만, 먹는 것만큼은 그 '시선'을 벗어던지는 게 어떨까.

  누군가에게 보여줄, SNS에 올려야 할 예쁜 도시락을 싸야 하는 게 아니라면, 진짜 즐겁게 먹고 싶은 도시락을 싸고 싶다면, 지금 당장 냉장고를 열어보자.


  어디에선가 죽어가고 있는 것들이

  눈에 띄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

  의외의 조합으로 꽤 맛있는 나만의 메뉴를 만들 수 있으니.

  그러면 하루 1시간의 점심시간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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