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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07. 2021

그렇게, 내 도시락통은 4개가 되었다.

뭔가를 시작할 때, 장비발을 세운 적 없다. 언제 그만둘지 몰라 늘 최소한의 재료로 시도해보고, 꾸준히 하겠단 확신이 섰을 때에만 물건을 구입했던 나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엔 도시락통이 무려 4개나 있다. 날이 쌀쌀해지니, 그에 걸맞은 도시락 하나 정도는 더 필요하지 싶다.


분명히 말하건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도시락을 싸기로 결심한 그 순간, 가장 고민했던 것은 도시락통이었다. 남편이 공부할 때 쓰던 써모스 도시락을 꺼내 봤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플라스틱 내부는 모두 흠집이 있었으며, 묘한 반찬 냄새와, 실리콘 패킹 사이의 쉰내까지 더해져 굳이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10년 가까이 된 도시락이라, 제 아무리 좋다는 써모스라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큰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적당한 가격, 무난한 디자인, 실용적인 구성이라면 괜찮겠지 싶었다. 인스타그램을 뒤적이니 감성 충만한 예쁜 도시락이, 쿠팡에 검색하니 락앤락 2단, 3단 도시락부터 값싼 1단 도시락까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도시락이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고르고 고르다 결국 딸내미 병원을 갔다가 들른 마트에서 적당한 사이즈의 2단 도시락을 골랐다. 반찬 통 1개, 그리고 밥 통 1개가 따로 있는 평범한 구성이었다. 당일엔 급하게 사느라 미처 보지 못했는데 통 안에 젓가락도 들어 있었다. 포크 숟갈이 아니라 '젓가락'이란 것에 안심하며, 사기 전에 그런 것 하나 확인하지 않았던 내 허술함을 탓하며, 그렇게 나의 첫 도시락통이 결정되었다.


꼼꼼하게 알아보지 못해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전자레인지에 용기를 넣고 2분까지는 사용 가능하다는 것, 도시락 가방 안에 보온(냉)재가 있다는 것, 가벼워 왕복 5시간 출퇴근 거리에서도 무난히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 등은 구매할 땐 몰랐던 부분이었다. 2주 정도 사용하니 마음에 쏙 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구매하는데 이유가 있다며, 네이버 포토후기는 정말 '진심'이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며칠 그렇게 들고 다니니 조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밥에 반찬. 새로울 것 없는 도시락통이 벌써 질리려고 했다. 가끔은 밥 대신에 샌드위치도 먹고 싶고, 그냥 샐러드만 먹고 싶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밥, 반찬 외에 과일을 가득 담아 가고 싶었다. 당장에 급해서 샀던 2단 도시락은 기본에 충실했지만,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3주 차에 접어들자, 변화가 필요했다.


마침, 남편에게도 도시락이 필요했다. 애 보면서 매 끼니를 대충 과자로, 빵으로 때우는 그에게도 밥을 챙겨주고 싶었다. 겸사겸사 남편용 3단 도시락과 샌드위치 도시락을 하나씩 구입했다. 3단 도시락은 이미 갖고 있는 것과 디자인이 똑같고 밥 통이 하나 더 있다는 것만 달랐다. 솔직히, 처음엔 똑같은 걸 두 개 구입하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같은 디자인의 반찬통 두 개, 밥 통이 세 개. 어찌 보면 단점이 될 수 있는 것이 도리어 장점이 되었다. 반찬이 필요 없는, 덮밥을 싼 날은 밥 통 두 개에 밥과 과일을 담아 갔고, 가끔은 샐러드만 먹고 싶은 날엔 밥 통 두 개에 전부 양상추, 토마토, 계란 등을 담아 갔다. 메뉴를 나름대로 조합해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성이었다.


함께 구매한 샌드위치 도시락은 정사각형의 모양에 삼각 트레이가 곁들여진 형태였는데 그 또한 좋았다. 샌드위치 두 개와 샐러드를 담으면 꼭 맞았다. 급식 메뉴가 지독히도 맛없던 날, 동료들이 "어우 오늘은 진짜 맛없다"라고 툴툴거린 날, 내가 싸간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하고.


그러다 보니 도시락을 싸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한식은 기본 도시락, 양식은 샌드위치 도시락 등에 담아 가니 매일 같이 새로운 느낌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뭔가에 빠지면 장비발을 세우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같은 구성이면 좀 더 내게 맞는 것으로 찾다 보니 연관검색어엔 늘 '도시락'이 줄지어 따라왔다.


한 번은 마트에 갔는데, 밀폐용기를 보는 내게 남편이 도시락통을 하나 권했다. 노란 뚜껑이 산뜻한 1단 도시락이었는데 소스통까지 있는 알찬 구성이었다. "네가 이렇게 진심일 줄 몰랐어. 이건 어때?" 마침, 1단 도시락을 사고 싶었다. 주먹밥이나, 김밥, 유부초밥 따위를 넣어갈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어찌 알고 척, 하고 건네준 것이다.


그렇게, 내 도시락통은 도합 4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두 개를 더 장만하고 싶다. 분명 실속파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현혹이 잘 되는 사람이었나 자책하다가, 기껏해야 만원, 이만 원인데 뭐 어때, 싶다가도 도대체 왜 이렇게 자꾸 사고 싶은가, 하고 곱씹고 곱씹어 보니


그 답은 내게 있었다.



나는 입은 짧아도 먹고 싶은 게 많은 사람. 매일 같은 반찬 먹는 것을 싫어해 늘 새로운 음식을 탐하는 사람, 음식에서 예쁜 색감이 어우러진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도시락은 그런 '나'를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식판에 담긴 급식을 먹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다채로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을 먹고 싶느냐에 따라, 도시락은 삼각형이었다가 사각형이 되고, 1단이었다가 3단이 되었다. 녀석이 마음껏 형태를 바꿀수록 나의 위장은 든든해지고, 마음까지 덩달아 행복해졌다.  


삶을 살아갈수록 세상엔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일이 많았다. 선의는 곡해되어 편견을 부르고 단절을 몰고 왔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도시락이었다. 그 안엔 내 취향이 담기고, 내 위로가 담겼다. 저녁 먹고, 빈 통에 반찬을 하나씩 담으며, '월요일은 힘드니까 네가 좋아하는 삶은 계란 많이 담았다'는 취향의 말, '내일도 힘내. 이거 먹는 순간만큼은 편해’라는 위로의 말도 곁들였다.


너무 바빠 살펴보지 못했던 '나'를 들여다보자, 조금은 천천히, 내 속도대로 먹기 시작하자,

매달 행사처럼 찾아오던 위경련이 2달째,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게 내 맘대로 싼 '나를 위한 도시락'이라면, 그 짧은 순간이 큰 힘이 된다면, 나는 더 살 의향이 있다.   


비록 도시락이 열 개를 넘는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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