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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30. 2021

밥 좀 편하게 먹읍시다.

내향형 인간의 점심시간

  관계지향적인 인간인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번도 '혼자'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쟤는 친구가 없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얼른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찾고, 친해지려고 노력하였으며, " 같이 먹자"라고 슬쩍 제안하곤 했다. 점심시간에 '혼자' 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밥 생각이 없는 날에도 상대를 맞춰 뭔가를 먹어야 했으며, 밥을 먹으면서 재미없는 대화에도 "아~ 그래요?"라며 공감을 해줘야 했다. 집에서 편하게 쉬면서 맥주나 한 잔 하고 싶은 날이었어도, 동료나 친구가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거절을 못했다. 혼자 밥 먹지 않게 해 준, 내 곁에 있는 소중한 동료,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그 정도의 자유는 포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혼자 있고 싶어졌다. 사람들 앞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관심 없는 분야에 호응하며 "저도 그거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도, 직장 점심시간엔 매일 같이 험담을 하는 것도 싫증이 났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직장에서 친해지게 된 동료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됐는데 이 모임에 아주 '특이'한 게 있었다. 식당으로 출발할 때부터, 음식을 주문해 먹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한 순간도 '험담'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ooo부장이 일을 못 한다"더라, "ooo대리는 일은 안 하고 매일 딴짓만 한다"더라와 같은, 갖가지 험담에 참여해 열심히 떠들고 그들과 한 뼘씩 더 친해진 점심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그 모임에서 밥을 먹은 날은 하루 종일 체한 듯 속이 답답했다. 결국, 난 그 모임에서 빠져나왔다.


  이상하게도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렇게 일을 시켰다. "oo 씨, 오전에 메시지 보낸 거 확인했어요?"라든가, "oo 씨, 보고서 다시 써야 할 것 같은데?"따위의 일과 관련된 말이 이 식탁과 저 식탁, 그리고 그 식탁 위를 넘나 들었다. 점심시간은 그래도 '쉬는' 시간인데, 어쨌거나 '일로 만난 사이'인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밥을 먹으면서 업무와 관련된 말을 쉴 새 없이 뱉어냈다. 마치, 지금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으로.

  

  성격이 급하고 주어진 걸 빨리 처리해야 하는 난, 밥을 10분 만에 후루룩 삼키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일을 했다. 부장님이 시킨 일을 하나씩 기억하며 처리했다. 메시지를 전송하며 마지막엔 꼭 이렇게 덧붙였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좋은 오후 되세요^^"

  정작 나는 한순간도 제대로 식사한 적 없으면서.



  

  이 모든 것은 '도시락'을 싸면서 말끔히 해소됐다.

  "같이 점심 먹으러 내려갈래?"라는 말에, "아뇨~ 전 따로 도시락을 싸왔어요."라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구내식당으로 가 조용해졌을 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작은 휴게실로 들어가는 순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난 좋아하는 지브리 OST나 아이유 노래를 들으며

  카레와 샐러드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꺼내, 천천히 꼭꼭 씹으며

  가끔은 좋아하는 복숭아를 잔뜩 싸와 과즙을 뚝뚝 흘리며, 그렇게 점심을 먹었다.


  그곳엔 나에게 억지로 취향을 강요하는 질문도, 남의 흉을 실컷 보며 "너도 그렇지?"라며 동의를 구하는 눈빛도, "일 처리는 하고 밥을 먹냐?"는 무언의 압박도 없었다.


  오로지 밥을 먹는다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 먹을 땐 내가 지금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허겁지겁 삼키고 다시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도시락을 싸 먹으니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음~ 볶음밥이 좀 싱겁네.', '새송이 버섯볶음은 얼른 먹어야지 안 그러면 쉬겠다.', '내일은 뭐 먹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으니 정말 제대로 먹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내가 보고 싶은 <크라임씬 2>를 보며, 가끔은 실없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마음껏 웃을 수 있었고, 식사 후엔 집에서 준비해 온 원두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렇다. 이것은 독립이었다.

  일로 만난 사이에서 유지해야 했던 팽팽한 긴장감으로부터

 "호호호~ 저도요!",  "(박수를 치며) 어머~ 정말요~?"라는 무조건 반사로 튀어나오는 리액션으로부터의 독립!


  그렇다. 이것은 자유였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먹을 자유.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할 자유.

  조용히 밥 먹을 자유!!




 하루 30분 간의 독립.

 덕분에 난 직장에서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직장생활을 해본 분들은 아실 것이다. '말' 때문에 흥하고, '말' 때문에 망한다), 동료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역시 아시리라. 일로 만난 사이는 '절친'이 될 수 없더라..), 잠시나마 '머리'를 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물론 메뉴를 고민하고, 요리하고, 가지고 다니는 게 꽤나 번거롭지만 그래도 괜찮다.



  도시락이, 내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덕분에 난, 이제야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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