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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ug 19. 2021

도시락을 싸기로 결심했다.

  그날 점심시간이 유난히 특별했던 것은 아니다. 평소처럼 조금 늦게 갔을 뿐이고, 그러다 보면 으레 반찬이 조금씩은 부족했을 뿐이었다. 가령, 생선 토막은 꼬리만 남아있다거나, 닭볶음탕엔 떡과 야채만 남아있다거나 하는. 그동안은 요새 세상에 이 가격에 이렇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잘 먹어왔다. 그런데, 그날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


  그러던 중 오후, 날아온 한 통의 메시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급식비용이 비쌌다. 다른 직장에 비해서 저렴한 편에 맛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두 항목 모두 충족이 안되니 메리트가 없었다.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결심했다. 급식을 먹지 않기 않기로 말이다. 7월이 얼마 안 남았으니 며칠만 버티면 되지 않나, 도시락이 안되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같은 거라도 싸가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충동적으로 '미급식 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아주 기본적인 요리만을 하며 연명하던 내가 '도시락'을 자처했다.

  생애 최초의 사건이다.




  하필이면 바로 내일이 7월 1일이었다. 7월 분 급식을 신청하지 않았으니 내일부터 당장 점심시간에 내가 먹을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집에 있는 것은 남편이 공부할 때 썼던 써모스 도시락과, 딸아이의 보온 이유식 통뿐.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가장 싼 도시락도 배송비를 합치면 10,000원이 훌쩍 넘었다. 언제 그만 둘 지 모르는 일에 돈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찬장을 뒤적이다 결국 가장 깨끗한 밀폐용기 하나를 골랐다. 메뉴도 고민하지 않았다. 딸내미 저녁때 먹인 뽀로로 후리가케를 넣은 주먹밥에 친정 엄마가 보내 준 진미 오징어채면 충분했다. 국물이 없는, 가장 깔끔한 메뉴. 용기에 가득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나를 위해, 내가 싼 최초의 도시락이다.


  솔직히 걱정이 됐다. 출퇴근 시간도 왕복 5시간이 걸리는데, 게다가 매일 같이 지하철, 버스를 타고 다니는 상황에서 도시락까지 추가되면, 너무 힘들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장 생활에서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한 몫인데 혼자 밥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도 소원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요리'를 대하는 나의 자세도 걸림돌이긴 했다.


   사실 난, 평소에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혼을 해서야 겨우 레시피를 보며 요리를 시작했지, 그 전엔 보통 김밥, 떡볶이, 라면 따위의 분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급식을, 그리고 저녁은 분식을 사다가 먹던 삶을 살던 내게 '요리'는 귀찮음 그 자체였다. 재료를 사고, 손질하고, 레시피를 확인하면서 요리를 하다가도, 중간중간 불을 조절하면서 간을 틈틈이 봐줘야 하는 요리는, 그 자체로 스트레스였다. 게다가 '손맛'은 전혀 없는 이른바 '똥손' 아니던가. 내가 한 반찬도 내 입맛에 맞지 않아 버린 적이 부지기수다. 그러다 보니 결혼 후에도 한 참 친정 엄마의 반찬을 받아먹으며 살던 '어른이' 아니던가.


  그런데 웬걸. 도시락을 싸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내가 원하는 메뉴를 선택해서 먹을 수 있다는 점!

  사실 급식을 먹을 때 가끔은 정말 맛이 없을 때가 있었다. 해물탕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꽃게는 하나도 없이 멀건 국물만 있거나, 짜장이 나오는 날엔 반찬이 단무지무침 하나만 있거나, 혹은 허여 멀건한 김치볶음밥 색깔에 실망한 날들 말이다. 그럴 때면 나가서 사 먹고 싶어도 직장 근처에 어떤 식당도 없어 이도 저도 못해 참 곤혹스러웠다.


  도시락을 싸니, 그런 걱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내 입맛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나',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도시락을 구성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도리어 즐거워진 것이다. 좋아하는 김치볶음밥을 싸며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춘 후, 계란 프라이를 올려 싸 가거나, 분홍 소시지를 부치고, 계란말이, 김치 볶음을 담고, 갓 지은 쌀 밥을 꾹꾹 담아 싸 가다 보니 도시락을 싸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린 것이다. 내가 아는 맛, 좋아하는 맛이 그려지는 도시락은 내게 설렘을 주었다. 마치 엄마의 도시락을 기다리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 그 기분 덕분에 지루한 직장생활에 소소한 즐거움이 생겼다. 거기에 예쁜 도시락통을 사서, 그 안을 채우다 보니 재미는 배가 되었다.


  자주 집밥을 해 먹게 된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보통 아이의 밥만 챙겨주고 나와 남편은 대충 때우거나 배달 음식으로 연명해왔다. 하지만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니 반찬을 준비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집밥을 먹게 됐다. 또, 수시로 냉장고를 확인하게 되어 식재료 파악도 쉬웠다. 내일 도시락을 싸려면 오늘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밖에 없다. '감자볶음, 감자조림, 계란찜, 진미 오징어채, 두부조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부추, 양송이, 양배추'가 아직 야채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당근, 양파, 대파, 애호박'을 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불필요하게 장을 보는 일이 줄었다. 두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두부를 사고, 콩나물이 다 물러 터져서 야채칸에서 썩어가던 시절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15일가량의 베타 테스트 후,

  변화가 생겼다.


  그 사이 나는 도시락통이 세 개나 생겼으며, 요리 실력이 소폭 상승했다.

  되는대로, 주는 대로 먹는 게 아니라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난,

  남은 반년도 도시락을 싸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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