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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Sep 26. 2021

샐러드를 먹고 싶은 마음이야

  어렸을 적 샐러드는 '사라다' 였을 뿐이었다. 사과, 감, 딸기, 바나나 등에 마요네즈와 설탕을 적절히 버무린 ‘사라다’는 손님이 오는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희귀한 음식이었지만 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느끼한 맛이 오히려 거북스러웠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동네 친구들과 함께 간 피자헛에서 인당 7,000원 가까이 주고 먹었던 샐러드 바도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입 짧은 내게 샐러드는 그냥 ‘풀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7,000원이면 김밥 한 줄에 라면 한 그릇을 먹는 게 더 나았다.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마음 먹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엘 가면 샐러드는 가격으로 미친 존재감을 뽐냈다. 리코타 치즈가 올라갔다는 이유로, 케이준 치킨이 있다는 이유로 10,000원이 넘는 녀석이 참 마음에 안 들었다. 그 가격에 샐러드를 시킬 바에 차라리 파스타를 하나 더 시키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런데, 도시락을 싸기 시작하자 샐러드는 꽤 매력적인 메뉴가 되었다. 


  사실 소화력이 좋지 않아 늘 가스 활명수를 달고 사는 나는, 점심을 너무 많이 먹으면 가끔 저녁까지 소화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곤 한다. 또 저녁때 폭식을 하면 마찬가지로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다음날까지 힘들다. 그럴 때, 샐러드는 아주 요긴했다.  


  처음엔 남편의 다이어트를 위해 샀던 양상추, 토마토에 좋아하는 삶은 계란을 담고, 오리엔탈 드레싱을 곁들이니 그럴싸했다. 야채 위주라 싫다 했던 샐러드를 먹으니 가벼워져 소화에도 좋았다. 가끔 양배추를 곁들이니 위장이 약한 나에게 도움이 됐다.


  그러다 보니 가끔 도시락 반찬으로 기름지거나 자극적인 메뉴를 싸갈 때에도 샐러드는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짜장, 볶음밥, 카레 등의 메뉴를 먹고 후식으로 샐러드를 먹으면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어 위장이 편안했던 것이다.


  게다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은 정말 큰 장점이었다. 식당이 아닌 곳에서 밥을 먹는 것이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휴게실이라고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기 때문. 특히 김치볶음, 제육볶음처럼 냄새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메뉴를 먹을 때에는 먹고 나서 부러 환기를 오래 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샐러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치 냄새 먹는 하마처럼, 이 전에 먹었던 음식 냄새를 다 흡수하듯, 샐러드를 먹고 나면 거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샐러드를 먹는 날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져 더 소화가 잘 된 것 같기도 하다.


  또, 초딩 입맛인 내 건강을 위해서도 좋았다. 요리를 시작할 때, 가장 겁이 났던 메뉴가 바로 ‘나물’이었다. 이상하게 아무리 레시피를 보고 따라 해도 맛이 잘 나지 않는 데다가 많이 해 놓으면 금방 쉬어버리고, 조금 해 놓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나물은 늘 내게 심리적으로 압박스러운 존재였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부러 챙겨 먹어야 하는 반찬, 하지만 만들기 전까지는 늘 스트레스인 반찬. 샐러드는 이런 걱정을 덜어주었다. 조리되지 않은 신선한 야채를 주기적으로 먹으니, 되려 ‘나물’이 아니어도 건강하게 먹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더 자주 찾게 됐다.


  이 맛을 들이고 나니 냉장고엔 늘 양상추, 토마토, 삶은 계란이 있다. 좋아하는 드레싱도 떨어지지 않게 잘 갖춰둔다. 혹시나 귀찮다고 샐러드를 포기할까 싶어, 양상추는 먹기 좋게 썰어 밀폐용기에 담아 놓고, 토마토도 늘 씻어 소분해 둔다. 계란은 한 번에 세 개씩 삶아 두고, 모양을 잡아 주기 위해 ‘계란 커터기’도 사 두었다.




  매일 같이 도시락 반찬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처럼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만사가 귀찮고 모든 것을 하기 싫은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에서 대충 삼각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사 가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날엔 샐러드가 나를 부른다.


  이번 주 힘들었지? 그럼 내일은 샐러드 어때? 아삭아삭하고, 시원하고, 개운하게 말이야.


  그러면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샐러드 도시락을 꺼내 나만의 샐러드를 만들어본다. 뭘 굳이 더 하지 않고 집에 있는 재료로만. 좋아하는 삶은 계란은 부러 두 개 넣어 예쁘게 자리를 잡아 주고, 드레싱도 두 통 준비한다. 10분도 걸리지 않아 뚝딱 만든 도시락을 포장하며 생각한다.


  그래, 오늘은 샐러드를 싸고 싶은 마음이야.

  그러면 내일은, 샐러드를 먹고 싶은 마음일 거야. 하고.  

.

.

.

  수 십 년 간 무시했던 샐러드가, 내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녀석의 ‘침입’을 흔쾌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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