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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리 Oct 03. 2023

반숙란의 꿈

#6

2023.10.2
제목: 반숙란의 꿈

나는 반숙란을 까는 일이 아주
능숙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까다가 자주

화딱지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죠 가령 속껍질과 겉껍질이 딱 붙어서

도저히 떨어지지 않다가 기어코 고운 속살까지
뭉텅이로 떨어져 나와 노오란 땜빵이 만들어지는

그런 비극이 있어도 말입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 지경이 되도록 두지 않는 편입니다

껍질이 단단히 붙어버려도 살살 구슬리면 결국은
떨어지게 되어 있거든요 행여나 흰자 겉 부분이 조금

묻어 나올 순 있어도 결코 노란 속 부분까지 홀라당
보이지는 않도록 말이죠 여기엔 필승의 비결이

있답니다 바로 시간, 시간이죠 서둘러 신발을 구겨
신다가 뒷부분이 아예 구겨져 버리거나 새끼발가락이

미처 들어가지 못한 순간의 당혹스러운 통증을 느껴본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실은 꽤나 간단한

비법입니다 그러니까 반숙란을 깔 때에는 서둘러선
안됩니다 흐흥 흐흥 콧노래라도 부르며 없는 여유라도

만들어내야 합니다 기세와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니까요
반숙란을 그렇게 좋아하냐 하면 글쎄요 역시 따끈따끈한

팬에 기름을 둘러 갓 구워낸 계란프라이가 최고 아닐까요
하지만 불 조절에 영 소질이 없어 계란만 팬에 깠다 하면

뻥 하고 예고 없는 뻥튀기 장수 기계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프라이에 삐죽 토끼 귀 같은 게 생겨버리는 바람에  

그런 모험은 잘 하질 않는 편입니다 약간 비리고
차갑더라도 반숙란이 좋아요 왜 차갑냐 이미 조리된 걸

 
사니까요 반숙 요리도 불 조절이 필수 아니겠나요

여하튼 재능이 없는 자는 시간을 써야 하죠 그게 바로


잠이 절로 쏟아지는 이리 밤이 깊은 시각에 내가 시를

쓰고 있는 연유 아닐까요 물론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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