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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꾸 Jun 22. 2020

잃어버린 배낭

첫번째 여행읽기

배낭을 잃어버렸다. 지구 반대편 튀니지의 아주 작은 사막마을에서.

분신처럼 업고 다니던 배낭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호텔 체크인까지 하고서야 등이 허전한 걸 알아차렸다. 가뿐한 몸으로 사뿐히 계단을 즈려 밟는 순간, 알아차렸다. 이 정체모를 허전함의 실체를.

“내 배낭!!”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살면서 눈앞은 캄캄하고 머릿속은 하얘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느냐 묻는다면 단연 이 장면이 떠오를 것이었다. 뒤늦게 쫓아가봐야 헛일이었지만 나는 호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택시는 이미 떠난 뒤였다.


차디찬 호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행 중 그 흔한 볼펜 한 자루 잃어버린 적이 없던 나였는데.... 온갖 세간살이를 다 짊어지고 다니는 여행자가 자신의 몸보다 귀중히 여겨야할 배낭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니, 어쩌자고 나는 잠깐 볼일이라도 볼 요량으로 시내에 나온 동네 아지매처럼 택시비만 덜렁 주고 우아하게 하차를 해버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생각이란 걸 시작했다.

‘배낭에 뭐가 들어있었더라?’

8kg 남짓한 배낭 속은 여느 여행자들의 배낭과 다르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가지들과 세면도구, 화장품, 침낭, 운동화... 다행이 가장 중요한 여권과 돈, 항공권이며 카메라는 모두 보조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까짓 거...’

곱씹어 생각하니 배낭에 든 짐이야 없어도 그만, 이라는 나로서는 꽤 배포가 큰 깨달음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 여권, 돈, 항공권처럼 여행자의 생명과도 같은 귀중품을 분실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그에 비하면 무거운 배낭 속에 욱여넣은 일상의 물건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짐’이 아닌가.

옷이야 입고 있는 걸 조금씩 빨아 입으면 되고(물론 밤사이 마르지 않으면 쉰내를 풍기며 여행지를 누벼야하는 불편이 있으리라) 로션, 선크림이야 뭐 생략하면 된다(얼굴에 기미와 버짐쯤이야..).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이것이 진정한 여행자 정신, 무소유의 정신이 아니던가.

사실 배낭을 쌀 때조차 최대한 줄이고 줄인 짐이었다. 하지만 배낭을 잃어버리고 나니 그조차도 꼭 필요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 물건들은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나?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제껏 나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움켜쥐고 살았던 건 아닐까. 그저 놓아버릴 수 없어서 미련하게 움켜쥐고 살았던 물건, 사람 그리고 기억들... 배낭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불필요한 ‘짐’들을 너무 많이 이고 살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툭툭 털고 일어나 호텔 프론트로 갔다. 머릿속이야 정리했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 실낱같은 희망으로 호텔 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배낭을 택시에 두고 내렸어. 어떡하면 좋지?”

“걱정하지 마. 찾을 수 있어.”

“어떻게? 난 택시 번호도 모르는데?”

“여기 두즈는 시내가 워낙 작아서 택시회사에 전화해보면 니가 탔던 택시를 금방 찾아줄 거야. 내가 전화해줄 테니까 기다려봐.”

내가 아는 프랑스어는 콧구멍을 한껏 벌름거리며 발음하는 '마드모아젤'이란 단어 뿐이다. 영어로 말했던 내게 프랑스어로 대답해준 그의 말이 어쩜 그렇게 쏙쏙 귀에 들어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이때의 경험으로 언어는 분위기와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또 긴박한 상황에서는 외계 언어라도 알아듣는 초능력이 생긴다는 이치도.    

배낭이 돌아왔다. 쌩하니 먼지만 남기고 가버렸던 택시가 돌아와 배낭을 내려주었다. 나를 도와준 호텔 주인이 기사에게 한 마디 했다.

“넌 왜 손님 짐도 안내려주고 그냥 가버렸어?!”

추측이다.


기나긴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온 몸은 땀범벅이었다. 배낭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둘러멘 보조가방까지 내려놓으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여행 내내 단벌숙녀로 만들 뻔했던 옷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뜨겁고 노오란 쇳물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졸졸 흘러나왔다. 정확히 땀을 씻을 정도의 양이었다. 샤워를 끝낸 나는 사막 한 가운데 지어진 호텔 방 침대에 쓰러져 끝 모를 잠에 빠져들었다. 되찾은 배낭을 꼬옥 그러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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