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언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mi Feb 05. 2019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

다시 프리랜서

이전에 썼던 글(아직은 직장에 다녀야 하는 이유 프리랜서 vs 직장인)에서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오게 되었다. 직전에 일했던 기관에서 업무 연속성을 위해 국제협력 사안 한 가지와 관련하여 통역과 번역 일을 외주로 주셨기 때문에 퇴직 후 두어 달 가량은 해당 업무만 하며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책을 읽고 전시나 공연을 보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지냈다.


계속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줄어가는 통장 잔고 때문에 IT 분야의 번역 일을 추가로 받게 되었다. 해당 업체에 하루에 1,000단어 이하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일할 수 있도록 업무량을 조정해주십사 부탁을 드렸고 흔쾌히 수락하셨다. 1,000단어 정도면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출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1,000단어에 하루 종일 시간을 투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학원 재학 시절과 갓 졸업한 뒤 프리랜서 시절 한창 번역에 물이 올라 있을 때를 기준으로 생각하여 하루 3~4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1,000단어를 번역할 수 있을 줄로 오판했던 것이다.


배경지식을 공부하며 원문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주요하게는 CAT 툴 사용이 문제였다. CAT 툴은 Computer-Assisted Translation의 줄임말로 번역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를 가리킨다. 가장 대표적인 CAT 툴에는 SDL Trados가 있다. CAT 툴의 장점은 여러 사람이 번역해도 용어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고 동일한 문장을 여러 번 번역해야 하는 수고를 줄여준다는 데 있다. 기존에 번역됐던 기록, 즉, 번역 메모리가 축적되어 있고 용어집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Trados의 가격이다. 가격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Trados를 사용하느니 벤더(Vendor)에서 차라리 CAT툴을 자체 제작해서 배포한다. 즉, 일을 주는 업체에 따라 사용해야 하는 툴이 달라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기껏 한컴오피스에 익숙해져 있는데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를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을 몇십 배쯤 곱해서 생각해보시면 되겠다.


SDL Trados Studio @ SDL Community


CAT 툴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에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Trados 사용법을 배웠고 프리랜서로 번역을 하면서 실제로 여러 CAT 툴을 사용해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하지 않는 능력은 퇴화된다는 점을 간과했다. 자격증을 따는 순간 모든 엑셀 수식 작성법을 머리에서 휘발시켰던 나는 퇴화에 특히 탁월한 소질을 보인다는 점도 잊고 있었다. 피아노를 10년 이상 쳤고 콩쿠르에도 나갈 정도였는데 지금 나의 손가락 근육은 베토벤과 쇼팽을 잊었다. 재주를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만 사용하는 나로서는 머리는 잊어도 몸이 기억한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CAT 툴 때문에 번역에 방해가 된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다시 CAT 툴에 적응하기가 어려웠고 차라리 맨땅에 번역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들었다. 번역에는 체력이 필요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머리가 맑지 않고 확연히 효율이 떨어진다. 게다가 뇌는 먹보다. 체중의 3%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중에서 20%를 소모한다. 머리를 쓰면 체력이 소진되고, 체력이 소진되면 번역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휴식이겠지만 번역에는 마감이 있다. 끝을 내기 위해서는 아무리 효율이 떨어져도 끈질기게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한다.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번역도 꾸준히 끝까지 하는 사람이 결국 보상을 받는다. 투입하는 노력과 시간은 결코 나를 속이지 않는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이제는 CAT 툴에 제법 익숙해졌고 왜 이걸 사용하는 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처음에 기대했던 일과 생활의 균형도 잘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일을 받으면 받는 순간부터 압박에 시달리고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불안이 커지는 탓에 뭐든 빨리 끝내야 마음이 편한 이 성격은 결코 고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젝트 매니저와 실시간으로 연락을 하며 수시로 업데이트해야 하는 짤막짤막한 작업보다 분량이 큰 장기 프로젝트를 더 선호한다. 분량이 짧으나 긴급한 사안에는 그 나름의 속도감, 현장감, 성취감이 있지만 매일이 마감이라는 스트레스가 무척 크다. 반면, 분량은 엄청나지만 그만큼 긴 기간이 주어지는 사안의 경우 양에서 오는 압박감은 엄청나지만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그만큼 크고 무엇보다 스스로 시간을 배분하고 조율할 수 있어서 좋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집중력이 높아지고 결과물이 좋아지기 때문에 초반에 쉬고 후반에 달리는 분들도 있다. 보고 있자면 재미있기도 하고 그 느긋한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투입한 절대 시간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머리가 맑지 않아도, 몸이 좋지 않아도, 일단은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한다. 회사에 출근하지는 않지만, 책상으로 노트북 앞으로 매일 출근한다. 프리랜서는 결코 프리하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 대학 졸업식을 빛낸 역대급 연설 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