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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Dec 12. 2020

prologue. 나는 평범하게 살긴 틀렸다?

내 인생 이대로 끝인가 싶은 사람들에게

“상세 불명의 발달장애입니다. 제가 더 이상 뭔가 해 줄 건 없네요.”


  둘째 아이 15개월 때 소아신경과 의사에게 들었던 말이다.

  39주 꽉 채워 태어났음에도 둘째는 날 때부터 작고 약하고 잘 못 먹고 잘 안 컸다. 만약 첫째가 그랬더라면 불안에 떨면서 더 일찍 병원을 찾아다녔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하나를 낳고 키워 본 경험이 있는 경력 맘이었고, 아이의 발달 속도는 제각각이니 조급해할 것 없이 그저 기다리면 알아서 클 거라는 모종의 자신감이 있었다. 워낙 작으니, 잘 먹여서 몸무게만 늘면 발달은 저절로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의 발달이 늦은 것이 장애와 관련된 거라는 걸. 발달장애가 무엇을 의미하고 발달장애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것이 어떤 맥락을 안고 사는 것인지, 이로 인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나는 털끝만큼도 알지 못했다. 나의 상상력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스스로의 평범성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나의 삶에 '평범하지 않은' '장애'라는 키워드가 끼어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듣고 오열할 만한 의사의 저 말을 듣고도 나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사회적(위선적)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진료실을 나왔더랬다.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하면서도 “상세 불명의 발달장애래. 자기가 더 해 줄 건 없다네? 어쩌라는 거야. 의사가 뭐 이렇게 무책임해?” 라며 툴툴댔을지언정 이후 우리 가족이 겪을 감정의 롤러코스터와 무한 돌봄 노동, 그리고 끝없는 대학병원 투어, 응급실 단골 방문, 재활 난민 생활 등에 대해 털끝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즉, 가정적인 남편과 일 좋아하는 아내가 둘이 열심히 벌면서 함께 아이 키우고 알콩달콩 투닥투닥 힘들지만 재미있게 일과 가정의 밸런스를 맞춰 가며 가끔 여행도 다니고 남들처럼 그렇게 단란하게 사는, 그런 평범한 삶이 당연히 내 것이고, '나'라는 사람이 'happily ever after' 하게 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내가 장애 아이를 낳았다. 이제, 삶의 모든 맥락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헌신해야 하며, 죽도록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박사학위와 일은 놓아야 하는 것이며, 둘째의 보호자로 붙박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첫째에게도 상처를 주는 못난 엄마가 될 것이 뻔하다. 내 삶은 이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불쌍하고 안타까운, 평범과는 거리가 아주 먼, 저쪽 어느 구석에 처박혀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그런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나 너무 나갔나? 그런데 이런 서사,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 하지 않은가? 이왕 상상한 김에 그럼 조금만 더 나가 볼까? 나는 어쩌면 눈물겨운 노력으로 그 장애 아이가 가진 특별한 재능을 찾아 장애를 ‘극복’하고 아이를 ‘성공’적으로 길러낸 위대하고 장한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지 않으면 그저 불쌍하고 초라하게 구겨진 인생을 살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아... 싫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싫다. 하지만 이게 바로 종종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흔한 장애 서사 아니던가. 불행하거나 위대하거나. ‘평범’이 끼어들 틈이 없는 이런 장애 서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장애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았을 때, "아, 이제 내 인생은 이대로 끝인가 보다."하고 눈물지을 것이다. 내가 '발달장애'가 뭔지 비로소 알게 됐을 때, 우울의 나락에 떨어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정말로 평범과는 거리가 먼, 불행하거나 위대한 인생을 살고 있느냐고?

  절대 아니다. 솔직히 '평범'이 무엇인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불행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그저 지지고 볶는 일상을 살아간다. 여전히 가정적인 남편과 둘이 같이 열심히 벌면서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알콩달콩까지는 모르겠지만 투닥투닥 힘들지만 재미있게 일과 가정의 밸런스를 맞춰 가며 아주 가끔이지만 여행도 다니고 남들처럼 그렇게 단란하고 '평범하게' 살고 있다. 물론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몇몇 장면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평범해 보이는 그 ‘남들’ 모두가 알고 보면 그렇게 눈물 콧물 짜며 살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감히 말한다. 내 인생 이대로 정말 끝인가 싶은 사람들에게, 우리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평범이 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겪은 일로 인해 우리 인생이 끝나는 거 아니라고. 뭐, 솔직히 조금은 더... 아니, 많이 더 힘들어질 수는 있는데, 괜찮다고, 잘 살 수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내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부터 내가 지하 땅굴 파고 내려 갔다가 어떻게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균형 잡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앞으로 나올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단계들은 하나 끝나면 하나, 그 다음, 꼭 이렇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각 단계들은 경계가 모호하여 서로 겹쳐지고 맞물려 있으며 동시에 여러 단계를 한꺼번에 휘몰아 겪기도 한다. 그리고 단계의 진행은 순차적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에는 다시 앞으로 돌아와 한동안 또 머물러 있기도 한다. 나의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영원히 그렇겠지만 그 안에서 나름 열심히 발장구치며 평범한 일상을 지키고자 고군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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