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식 수필? 수필춘추 겨울호에 낼 원고입니다.
3가지 주제에 대한 소회
#지극한 도
지극한 도(道)라고 해야 별거 없으니 오직 이것 저것 (집착)하지만 않으면 된다. 사고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말로, 불경에서 온 말로 알고 있다.
일찍이 고전에서도 ‘도는 하나인데 그에 이르는 길이 도교, 유교 등 다양하다.’란 명제를 본 기억도 있다. 일종의 편파적 시각을 제외하고 통합적 사고를 하란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인생은 더러운 강물과 같다. 스스로 깨끗해지기 위해선 바다와 같은 존재가 되야 한다. 이 문장처럼 일견 순간의 분노도 참지 못하는 인간이지만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기독교를 생각한다. 배타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것이 진리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리라면서 이것도 저것도 다 허용하면 그 자체가 모순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의 정의가 다르듯이, 대관령 넘어 말투가 달라지듯이 인간의 기준이란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것도 조금씩 다르지만..그럼에도 인간이 모두가 같으면서도 다르듯이, 인간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공통의 분모를 우리는 양심이라고도 하고 측은지심이라고도 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당위고. 또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다소 기독교에 대한 변명으로 들릴 수 있지만 기독교란 결국 예수님을 믿는 종교요, 또 예수를 통해 진리에 닿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장점은 개인적으로 외부가 아닌 스스로에서 답을 찾는 것이라 보인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세상에 정답은 있다. 다만 찾기 힘들뿐이다.’ 이 말도 일견 맞는 말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세상에 좋은 말이 부족해서 혼란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넘쳐나는 말의 홍수, 방송들. 그리고 수 많은 언론들.
인간은 언어적 존재. 반려견이 인삼도 먹고 유모차도 타니 그나마 아직 말은 못하는 차이점을 넘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진실 혹은 지극한 도를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삶이 끝이 아닐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는 이유는 삶이 힘들기 때문이다.
즉 고통은 우리를 성숙시킨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이다.
우리는 행복을 갈구하고 돈에 얽매인다.
진실은 우리를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사실 행복이란 복잡한 것 보다 단순한 데 있을 것이다. simple is the best.
행복어사전에 보면 행복엔 사실 많은 게 필요치 않다. 그러하니 모든 행복의 조건을 거부하라.
간헐적 단식이 과식보다 훨씬 몸에 좋은 것을 보면..그러나 늘어나는 뱃살..
말은 해야 말이지만, 말로 주고받는 상처들..그러나 그것을 감당할 수 있고..
삶에 부대낌을 이겨낼 수 있다면..지극한 도는 오히려 저 산속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구상시인의 시한구절이 떠 오른다. ‘니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도자적 삶. 도를 구하는 자세. ‘도를 아십니까?’ 외친 청년이 도를 알까. 그렇다고 내가 알까마는. 설사 내가 조금 느낀 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기란 무망한 노릇인 것이다. 어째든 이 짧은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나비가 번데기에서 오듯이, 우리가 이 삶이 끝이 아니라고 믿고 이 삶이라는 과정을 잘 헤쳐나가면 결국 진실이란 자유를 맞닥뜨릴 날이 올 것이다. 지극한 도란 별 거 없다고 하니..
#그림값
화가가 죽으면 그림값이 뛴다. 이 문장 속에는 예술, 죽음, 투자가 모두 들었다. 예술은 길고 생은 짧다, 투자는 값이 저렴할 때 해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밀알이 땅에 떨어져 한 알 그대로 있으면 그만이지만, 죽으면 수많은 것으로 태어난다. 죽음은 생의 종말이지만, 어쩌면 영원으로 닿는지 모른다.(바로 그 시작)
우린 생으로도 벅차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 없지만 그럼에도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한번 싸워봐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죽음을 직시하고, 그것을 그릴 수 있는가?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기 위해선 기차를 타야하듯 별에가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도 배고픔이 해결 된 뒤다. 아무리 그림이 고급투자라 해도, 수많은 아사앞에, 무슨 그림을 그릴 것인가!
예술혼에 불타서 그림을 갈구하는 영혼은 지저분한 세상 속에서 사람을 깨우는 것을 그리는가? 이 세상은 어떤 그림인가? 성선설에 맞는가, 성악설에 맞는가. 그렇다면 인생값은 얼마일까? just priceless.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들꽃에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고 했다. 물에 삶을 물었다. 흐르는 일이라 했다. 산에 삶을 물었다. 견디는 일이라 했다.(민병도 삶이란 中)
죽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게 어려운 것이다. 공자의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는 말도 그렇고. 죽음이 와야 죽음을 아는 것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실패예찬’이란 책의 글귀가 강렬하게 남았다. 자연은 우리가 죽음을 무시하도록 프로그램해 놓았다는 것이다. 우연히 존재하게 된 우리는 생존하고 번식하는 것이 주된 임무이지, 죽음과 소멸처럼 불안한 문제에 대한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란 것이다. 삶은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생각하는 존재가 자신의 비존재, 사고와 삶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천재와 바보 모두 죽음에 직면함에 있어 똑같이 좌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 삶이 아무리 만족스러워도 똑같은 종말이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죽음은 삶의 절망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겐 구원일지도 모른다. ’죽음으로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나니..‘
어떤 일본인의 문장에 죽음에 도전하는 방법은 종교에 귀의하거나 죽거나 미치거나..란 문장이 기억난다.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체로서 우리가 가진 근본적 본능에 어긋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선택할 수 있다. 문학은 종교든 심리학의 모양을 한 것이든 그져 그대로 보이고 기록하면 그만이듯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못 바꾸더라도 그것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창조계획에 인간의 행복이란 애초에 없었다.(프로이트)’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한복음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