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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Dec 12. 2018

가위가 사라졌다

  가위가 사라졌다. 엄마가 또 주방 가위를 숨겼나보다. (치매가 있는 엄마는 가위를 보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자꾸 숨긴다.) 또 하루 이틀 지나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쉽게 발견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저녁밥을 준비할 때는 그래도 견딜만한데,  마음이 바쁜 아침에는 가위의 간편함이 더욱 생각난다.


 가위가 있으면 포장된 음식 재료의 비닐봉지 끝을 살쿵 자르면 되지만, 가위가 없으니 비닐봉지 하나 여는 것도  비닐봉지를 칼로 구멍을 낸 뒤 손으로 비닐을 쭈욱 찢어야 된다. 또 생선 손질도 가위가 있으면 생선 지느러미 정도 가위로 몇번 툭툭 끊어주면 되지만, 가위가 없으면 지느러미를 자를 때에도 생선을 도마 위에 올리고 미끌거리며 잘리지 않는 꼬리지느러미를 겨우 끊어내고 옆 지느러미는 칼로 자르려니 난감해서 아예 자르기를 포기한다.  또 가위를 쓸 때는 필요 없는 도마가 칼을 쓰니 도마를 꺼내고 씻어 말려야 하는 일도 추가된다. 이 외에도 김치 자르기, 구운 김 자르기,  과일 액기스 비닐 용기 자르기, 구운 삼겹살 자르기 등 소소하게 가위의 부재는 나를 성가시게 한다.

가위 대신 칼을 쓰면 되려니 하고 버틴 요 며칠을 이제 참을 수 없어, 내일 꼭 가위를 사야겠다고 결심한다.


 가위와 칼은 서로 대체제라고 생각했다. 가위가 없으면 칼을 대신 쓰면 될 것이라고, 아니 칼만 있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사흘간 가위가 없으니 가위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칼의 대체품이 아니라 가위의 역할이 이렇게 컸다니 가위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다른 것도 그렇지 않을까?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물건, 대체재가 따로 있을까?  작은 쓸모라 해서, 그 물건의 존재 이유가 작지는 않다.  그러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물건이나 사람은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그 존재 이유가 무뎌져 물건이든, 삶이든 녹이 슬기 시작한다. 그러면 쓸모 있던 도 결국 쓸모없는 이 되어 버린다.


  엄마는 아침마다 출근하는 나를 붙들고 질문을 한다.

" 오늘 내가 할 것 없나?"

본인의 쓸모를 확인하는 엄마에게 나는 무정한 대답을 한다.

 " 응, 없어. 약이나 꼭 챙겨 드세요."


 시무룩해진 엄마는 모두가 출근한 텅 빈 집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아 헤맨다.

얼굴 닦는 수건으로 방과 거실 바닥을 열심히 닦고는 나름 깨끗이 빨아 다시 화장실 수건걸이에 걸어 둔다. 그릇 건조대에 물기 말린 그릇들을 엉뚱한 자리에 차곡차곡 챙겨 놓는다. 집에 돌아온 나는 화장실에 축축하게 널브러진 수건의 위생 상태에 의혹이 들고, 필요한 그릇을 찾아 싱크대 수납장을 뒤지다 어느 구석에서 뒤섞인 그릇들을 발견한다.

 

" 엄마, 내가 집에 와서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놔 ."

나의 망언에 엄마는 스스로 쓸모없음을 느끼며 좌절한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어한다.   대부분 물건 용도를 잊어버린 나의 어머니는 본인 자신의 용도조차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 나의 무심한 한 마디에 자신의 용도를 부정당한 모욕감이 들어 소리친다.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내가 이 집을 나갈까?"

그럼 나는 아차 싶은 마음에 엄마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가 안될 위로를 나에게 하듯 중얼거린다.

 " 엄마, 엄마가 있어주는 것만 해도 나는 엄청 힘이 돼.  엄마, 언제까지나 꼭 내 옆에 있어줘야 해."

한참을 울그락 불그락하던 엄마는 또 다정한 엄마로 돌아온다.


 오늘도 퇴근 후 바쁘게 저녁 준비를 하는 내 앞을 막고 엄마는 말한다.

 " 내 할 거 없제?"

그럼, 나는 번거로워도 굳이 도마와 칼을 준비하고 오늘 반찬에 들어갈 재료를 손에 쥐어주고는 이걸 썰어달라고 말한다. 그러면 엄마는 '어떤 모양으로 썰어야 하는지', '이렇게 하면 되는지', '어디에 담아야 하는지' 등등을 끊임없이 물으며 오히려 나를 번거롭게 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혼신의 힘으로 썰어놓은 울퉁불퉁한 재료들이 들어간 반찬을 오랫동안 엄마랑 같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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