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오란 별처럼 노오란 계란죽
내 영혼의 허기를 달래다
'이거 한 그릇 먹고 자라'
열감기에 까무룩 잠든 나를 엄마는 흔들어 깨운다.
비몽사몽 앉아 있는 내 얼굴 가까이 계란죽 한 그릇이 들어온다. 엄마는 죽그릇을 내 얼굴 가까이 대고 한 숟갈 가득 떠서 입에 넣어준다. 엄마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는 아픈 자식을 두고 출근해야 하는 어미의 아린 가슴을 모른다. 그저 밀고 들어오는 숟가락에 마지못해 메마른 입술을 조금 벌릴 뿐이다. 미각을 잃은 까끌한 혀는 죽이 달갑지 않다. 하지만 이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며 입맛을 깨우더니 혀끝에 닿는 보드라운 계란의 촉감과 폭신한 죽의 따스함이 마음까지 닿는다. 부어있는 식도를 간신히 넘어간 한 숟갈의 죽은 허기진 아이의 영혼을 따습게 채운다. 그리고 상쾌한 공기가 열에 들뜬 뺨을 훑고 지나간다. 순간 열에 잃었던 기운이 혈관을 따라 조금씩 되살아나며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뜨게 한다. 그때 눈 앞에 검은 하늘이 들어왔고, 반짝이는 별들이 내려왔다. 내가 있는 곳은 방안이 아니었다. 단칸방 문을 열면 정지라 불렀던 작은 부엌이 있고, 그 부엌 문을 열고 나오면 아주 작은 마당에 아주 작은 평상이 있다. 나는 그 평상 위에 앉아 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좁은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죽을 끓인 엄마는 다른 식구들이 깰까봐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나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나는 왜 이때의 기억이 그날의 별처럼 내 머리 속에 박혀 지금껏 반짝이는 걸까? 엄마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멸치볶음, 어묵볶음, 호박나물, 콩나물 반찬, 깻잎 반찬 등 뻔한 밑반찬들과 시래깃국, 된장찌개, 생선조림 등 시커먼 국, 찌개 몇 가지로 돌려막기하며 엄마는 가족들의 반찬 투정을 못 들은 척하였다. 내겐 정말 지겹기만 한 반찬들이었다. 무엇보다 한 번에 냄비 가득 만들어 일주일 내내 먹는 것이 내겐 정말 고역이었다. 그래서 내게 엄마 밥에 대한 추억은 특별한 것이 없다. 지금은 그 맛이 그립지만 그건 시간이 가져다준 아름다움일 뿐이다. 다른 집 엄마들처럼 노란 계란물 입힌 분홍 소시지, 부드러운 감자 사라다, 고소한 도넛을 뚝딱뚝딱 만들지 못하는 엄마가 종종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그때의 엄마에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그런 엄마가 아픈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별식이 아마 계란죽이었을 것이다. 피곤한 몸으로 밤 10시에 퇴근한 엄마는 잠들어 버린 아픈 딸아이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 먹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부엌 한 켠의 곤로 심지에 불을 켜고 냄비를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밥이나 생쌀을 넣고 나무주걱으로 한참 저어 밥알이 완전히 풀어지면 귀한 계란 2개를 아낌없이 풀어 휙휙 둘러주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후 불을 끄고 참기름 한 숟갈, 깨소금 한 번 후루룩 뿌려주면 끝이었을 간단한 음식, 계란죽을 끓였을 것이다.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 봤으나 그 맛이 나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멸치 맛국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기억의 조각을 많이 놓친 엄마께 여쭤봐도 알 수 없다.)
지금도 몸이 안 좋으면(사실, 몸보다 마음이 허기지면) 그때의 노란 계란죽 생각이 꼭 난다. 고소한 그것을 한 숟갈만 엄마가 떠서 내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바스라질 것같던 내 영혼도 일어설 것만 같다. 노오란 그 색깔만 떠올려도 군침이 돌고 사라졌던 기운이 솟아날 듯하다. 어쩌면 내가 먹고픈 것은 계란죽이 아니라 그 시절 곤로 앞에 앉아 죽을 끓이던 기둥 같았던 엄마의 어깨, 내 입을 보며 나와 함께 '아'하며 입을 벌리던 엄마의 푸근한 얼굴, '엄마 손은 약손'하며 노래하듯 중얼거리며 내 배를 쓰다듬던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의 추억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 내 옆에 앉아서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켜 놓고 자꾸만 꼬박꼬박 졸고 있다. 엄마는 지금 어떤 꿈을 꾸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