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모가 되었다. 내가 부모가 되자 나의 부모는 늙어버렸다. 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든든하고, 가장 지혜로웠던 나의 부모가, 내가 부모가 되자 힘없고 병들고 외롭고 쓸쓸한 노인이 되어 버렸다.
나의 아이가 자라자 나의 부모는 더욱 늙고 가벼워졌다. 그래서 나의 사랑으로 꾹꾹 채우지 않으면 내 부모의 몸은 땅으로 꺼질 듯, 하늘로 날아갈 듯 야위었다.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다. 왜 나의 부모가 계속 강하고 힘세고 현명하고 용기 있지 않은지, 왜 변해 버린 것인지 인정할 수 없었다. 엄마의 성격 변화 그리고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나는 <나이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란 책을 통해 그 모든 것이 나의 잘못도 부모의 잘못도 아닌,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알았다. 그렇게 부모의 변화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알게 되었다. 부모를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 그리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시키려는 태도가 오히려 부모를 화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외롭게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모의 추억과 기억과 과거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 그것만으로 늙은 부모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무함의 그늘을 벗어던질 수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를 읽었다. 제목도 섬뜩한 이 책을 처음에는 읽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떨치려 애쓰고 무시해 온 진실을 마주하고 싶었다.
이 책에 따르면모든 생명체는 자식을 만들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면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한 것이기 때문에 그 후론 빠르게 스스로를 소진하고 사라지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남성보다 여성이 조금 더 오래 사는 것도 자손을 일정 기간 돌보기 위한 유전적 장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손을 늦게 만들면 그만큼 노화가 다소 늦춰진다고 보았다.
부모의 노화 그리고 나의 노화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우주 속 생명의 본질이 서럽기도 하고 담담하기도 하다. 인간은 다른 생명과 달리 사는 동안 자신의 유한성을 계속 인식한다. 점차 자신이 늙는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노년이 되면 그것이 더욱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당장 나의 일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을 스스로 회피한다. 인간은 그렇게 수시로 알면서 수시로 부정하며 살아간다. 그 유한성을 잊고자 종교가 탄생했고 그 유한성을 극복하려 철학이 탄생한 게 아닐까?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인간은 그 유한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러한 인식과 회피는 강해지고 그것이 삶과 관계의 왜곡을 만들기도 한다.
부모의 노화의 과정을 바라보는 자식의 마음은 그래서 씁쓸하고 안타깝고 감사하고 죄송하다. 나의 노화를 바라보는 마음은 그래서 미묘하고 쓸쓸하고 담담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효도를 생각한다. 내가 갈 길을 먼저 가고 있는 선배로서 나의 부모를 바라보며 나의 미래도 쓸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엄마의 노년의 변화를 인정하고 수용하게 되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만지며, 아직도 까맣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한다. 자신의 왜곡된 기억이 사실인양 웃으며 내게 말하는 것에도 거부감 없이 함께 웃으며 맞장구치는 나를 발견한다. 굳이 진실을 전하려 애쓰지 않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거짓말로 편안하게 해 드리는 나의 진심을 믿는다. 엄마의 눈높이에서 웃고 말하고, 장난치는 나의 모습이 조금은 부모의 삶과 노화에 대해 겸허한 태도라는 것을 요즘 들어 나는 깨닫는다. 그제야 나의 엄마는 내게 여전히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제 나이 든 부모의 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노화도 받아들여볼 생각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 삶과 노화와 죽음에 대한 극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