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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May 29. 2020

고3으로 복학하다  

반 년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학교를 마쳤다 

입원을 한지도 반 년이 되었다. 재활의 목표는 뭘까. 신경이 손상된 장기 입원 마비 환자들은 뭘 위해서 치료를 계속 받아야하는 걸까. 엄마와 난 늘 '우린 저 병원 문을 걸어서 나갈 거야'라고 말했다. 걸어서 나갈 수야 있었다. 발목에 보조기를 차고, 지팡이를 짚고, 옆에 누군가가 내가 넘어지지 않을까 지키고 서서. 그렇게 '걸어서' 나가는 것도 병원 문을 걸어서 나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휴학을 더 길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면 졸업은 불가능했다. 나는 고2 가을에 휴학을 하기 시작해서 다행히 진급에 필요한 출석 일수를 수술 전에 다 채워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고3 출석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더 오래 휴학을 하면 고3으로서의 출석 일수가 부족해서 그 다음 해에 후배들과 학교를 다시 다녀야 했다. 만약 주치의가 '무조건 입원을 더 해서 재활 치료를 더 받아야 한다' '지금 퇴원하면 안 되다'고 강력하게 얘기 했으면 복학은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입원하면 좋기는 하겠지만 알아서 하라'고 했다. 어차피 재활의학과에 입원한 많은 환자들이 일상생활이 홀로 가능해지면 퇴원한다고 했다. 나는 비록 잘 걷지는 못했지만 먹고 씻는 등의 일상생활을 홀로 할 수 있기는 했다. 

 

난 저녁마다 회진을 오는 인턴, 레지던트들에게 물었다. 

"저랑 상태가 비슷하던 환자들은 언제쯤 퇴원했어요? 제가 더 오래 입원해서 재활하면 여기서 더 많이 상태가 좋아질까요?"

늘 같은 답이었다. 

"그건 환자들마다 달라요." 

이때도, 여기서도, 진리의 사바사, 케바케였던 것이다. 엄마와 난 몇날 몇일을 고민하고, 병원을 저녁에 몰래 탈출해서 근처 도령을 찾아가서 점도 보고 사주도 보고 타로도 보고 결국은 고3으로 복학하기로 했다. 나도 그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1년을 기다렸다가 얼굴도 모르는 후배들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렇게 무리해서 고등학교 복학을 했다. 그 때도 잘 걷지 못 했다. 보조기와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걷지 못 했고, 짧은 거리도 절뚝거리면서 넘어질 듯이 걸어다녔다.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던 교문이었는데 반 년 만에 그 앞에 서니 너무 무섭고 떨렸다. 6개월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교문 앞에서 한참을 학교로 못 들어가고 엄마 차에 앉아서 떨었던 기억이 난다. 괜히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오랜만에 안경을 벗고 렌즈까지 꼈더니 내 얼굴이 너무 적응이 안 돼서 더 이상해 보였다. 


친구들 모두가 이미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앞으로 나와서 친구들에게 인사하라고 했다. 난 그냥 많이 도와달라고, 보고싶었다고 한 마디 했다. 웃기지 않은 말이었는데 애들이 열심히 웃어줘서 고마웠다. 특히 맨 앞줄에 앉아있던 남자애가 열심히 큰 소리로 웃어줘서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 날은 모의고사 날이어서 인사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등교를 했다. 


학교에서는 늘 너무 심장이 떨렸고, 너무 긴장됐다. 긴장을 하면 몸이 굳기 마련이다. 나는 긴장을 하면 더 심하게 절뚝거리면서 걷기 때문에 학교에선 늘 절뚝거려야 했고, 그래서 되도록이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학교의 모두가 나에게 친절했고, 내가 도와달라면 기꺼이 도와줬다. 그게 고마웠지만, 이기적이게도 나는 그 과한 배려가 불편하기도 했다. 입장 바꿔 생각해서, 한 반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아프다고 하면 나 같아도 별 생각 없이 도와주고 배려할 것 같은데, 막상 그런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니 너무 불편했다.


우리 학교는 엄청난 오르막길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혼자서는 그 오르막길을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기 때문에 등하교를 가족 중 한 사람이 늘 동행해 주어야만 했다. 하루는 시험을 보느라 하교 시간이 평소보다 더 일렀다. 친구들 하나 둘 씩 교실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도 눈치가 보여 교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단 1층으로 내려왔다. 아무리 엄마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내리막길만 어떻게든 내려가면 택시를 잡아서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리막길을 도저히 넘어지지 않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대부분의 친구들이 하교를 했고, 그나마 친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둘러봤으나 집에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같은 반이라서 얼굴은 알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 좀 내리막길까지 데려다줄래? 나 택시타고 집에 가야되는데 내리막길을 못 내려 가겠어"

라고 말했다. 물론 그 친구는 흔쾌히 나를 도와줬다. 자신과 함께 가던 나를 모르는 친구들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말하고 자신의 팔을 붙들고 천천히 걷는 나와 속도를 맞춰서 거의 나를 엄호하는 느낌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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