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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ISU Jul 16. 2020

자연이 주는 선물, 유기농

빨간 동그라미와 초록색 하트를 찾아라

예쁜 소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집 근처 마트로 자주 장을 보러 다녔다.

그곳에는 난생처음 보는 채소와 과일들도 많았고, 수십 가지의 유제품들과 다양한 빵들, 그리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종류의 간편식들까지 참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한국과는 기후도 다르고, 먹는 음식의 종류도 다르니 마트의 풍경이 다른 건 당연하다.

덴마크는 낙농 강국답게 우유와 요구르트, 치즈와 같은 유제품들의 종류가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요구르트의 종류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우유라고 생각해서 사 오면 대부분은 우유가 아니라 요구르트였다. 제품의 패키지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요구르트 패키지가 아니라 주로 우유를 담는 카턴 팩에 담겨있어서 처음에는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핸드폰에 있는 번역기를 돌려보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우유와 요구르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나의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들은 계속 발생했다. 

수십 가지는 족히 되는 밀가루를 고르는 일도, 곡물들이 가득 들어있는 수많은 빵들 중에서 입맛에 맞는 제품을 고르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종류가 다양해서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입맛을 고려한 배려인데, 제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덴마크어도 모르는 나에게는 이런 배려가 오히려 쇼핑시간을 길게 만드는 불편함 중 하나였다.

게다가 덴마크는 일반 식품점에서 유기농 제품을 함께 판매하기 때문에 같은 제품이라도 유기농인 제품과 그렇지 않은 제품이 함께 섞여있었다. 이것 역시 처음에는 나의 선택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덴마크 제품들은 영어를 병행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번역기를 돌려서 찾아봐야 했고,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단어들도 많았다. 그리고 당연히 늘 먹고, 쓰는 제품이라서 그런지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투명하게 포장이 되어있는 경우는 내용물을 보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는데,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보이지도 않는 내용물을 패키지 겉면의 단어 몇 개만으로 유추를 해내야 했다.

어느 날은 밀가루를 사 와서 포장을 열어보니 종이 파우치 안에 노란색 가루들이 가득했고, 또 어떤 날은 참치캔 안에 오일 대신 물이 가득 들어있어서 마치 캔 속의 참치를 물에 씻어먹는 것처럼 맛없는 참치를 사 오기도 했다. 카턴 팩에 담긴 우유를 컵에 따르는 순간, 물처럼 투명한 우유를 보며 당황한 적도 있었고, 전혀 바삭하지 않고, 너무나도 건강한 곡물들이 가득 들어있는 맛없는 뮤즐리를 먹느라 목이 메이기도 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글을 읽지 못하는 나이가 많은 노인과도 같았다.

나이가 들면 설사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눈도 나빠지고 새로운 제품에 대한 인지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매일매일 사소한 것들까지 선택의 어려움을 겪던 내에게 쇼핑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면서 선택을 용이하게 해주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건 덴마크에 온 지 한 달 여가 지난 뒤였다.

다양한 종류의 곡물가루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의 모습

세계에서 가장 유기농 제품을 많이 소비하고, 많이 판매하는 유기농 강국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바로 덴마크이다. 덴마크에서는 유기농 전문 매장이 아닌 일반 슈퍼마켓에서도 유기농 제품을 많이 판매하고 있어 손쉽게 유기농 제품을 구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일반 제품에 비해 5~10% 정도밖에 비싸지 않아서 유기농 제품을 사 먹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 유기농 샵에 가보면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에 구입이 망설여지곤 하는데, 덴마크 사람들은 비용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유기농 제품을 별다른 고민 없이 구입하곤 한다.

덴마크의 유기농 제품은 왜 비싸지 않을까?

덴마크에 살아보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덴마크는 기본적으로 날씨가 춥기 때문에 벌레들이 많지 않다. 여름에도 모기가 없어 모기에 물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환경에 유해한 화학물질들은 정부에서 세금을 많이 부과하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농약의 가격도 예외일리 없다.

그리고 그들의 농업은 기업화되어있고 시스템화 되어있다. 물론 어업도 축산업도 마찬가지다. 소규모로 운영되지 않는다.

물론 덴마크 정부에서 유기농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투자를 많이 하기도 한다.

내가 덴마크에 살았던 2018년 덴마크 정부는 유기농 시장 육성을 위해 1900억 원이라는 큰 비용을 유기농 시장 육성을 위해 투자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덴마크 사람들은 유기농 제품을 손쉽게, 그리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덴마크에는 유기농 브랜드들도 참 많이 있는데, 영국의 Marks&Spencer 다음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된 'Irma'라는 이름의 유기농 제품을 주로 판매하는 마트가 있다. 예쁜 소녀 아이의 얼굴이 그려진, 바로 내가 자주 다니던 그 마트이다.

지금부터 130여 년 전 작은 지하실에서 달걀과 버터, 그리고 크림과 마가린을 팔면서 시작된 브랜드이고, Irma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인 소녀의 모습도 3살 된 딸 Else를 모델로 심벌마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3살 된 딸아이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질 좋은 유기농 식품을 판다는 의미가 되기도 해서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과 유기농 마트의 이미지가 참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Irma에서는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PB(Private Brand) 제품의 질도 좋지만, 다양한 유기농 브랜드들도 잘 갖추어져 있다.

Irma 매장의 입구 모습

덴마크어로 유기농은 økologisk라고 쓰는데, 줄여서 øko라고만 쓰기도 하고, 유기농을 인증하는 ø모양의 빨간색 동그란 마크가 붙어있어서 일반 제품들과 쉽게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제품을 선택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덴마크 제품들의 디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히 소비자들에 대한 시각적 배려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인 감각이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글로 쓰는 것보다 누구든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비주얼 화하거나 아이콘으로 만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농 제품에 표기되는 유기농 마크의 경우도 자신들의 언어를 활용한 쉽고 심플한 아이콘으로 소비자들이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이 빨간색 동그라미 마크만 보면 굳이 작은 글자들을 읽지 않아도 유기농 제품을 몇 초 안에 구별해 낼 수 있다. 이 마크는 내가 유기농 제품을 찾느라 패키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시간을 줄여주었다.



유기농 마크가 잘 보이는 제품 디자인

두 번째로 내가 쇼핑할 때 도움을 많이 받았던 마크는 'The Keyhole Label(열쇠 구멍 마크)'이라는 마크였다. 녹색 컬러의 열쇠 구멍 마크는 건강에 좋은 식품, 예를 들면 동일한 유형의 다른 제품보다 지방, 설탕, 소금의 함량이 적고 식이섬유가 더 많이 포함되어있어 건강관리에 도움을 주는 제품에 붙이게 된다. 다이어트를 하거나 알레르기가 있거나, 특별히 식사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마크인데, 이 마크는 덴마크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안 국가에서 모두 통용되는 마크이며, 'Healthy choices made easy'라는 슬로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건강한 식품을 쉽게 고르도록 만들어 준다.

비슷한 제품이라도 이 마크가 붙어있으면, 제품에 대해 더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샀던 물에 담긴 참치나 물처럼 투명한 우유를 사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덴마크에서는 원산지를 표시하는 방법도 글이 아니라 비주얼이다. 한국에서는 깨알 같은 원산지 표시를 찾느라 제품을 이리저리 돌려서 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덴마크에서는 쉽게 구별된다. 덴마크 국기의 이미지가 패키지에 붙어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한우가 가격이 비싸고 맛이 좋은 것처럼 덴마크에서도 덴마크산 소고기가 가격도 비싸고 품질도 좋기 때문에 반드시 원산지 표시로 덴마크 국기의 이미지가 잘 보이도록 디자인한다. 물론 육류뿐만 아니라 모든 제품들에서 덴마크 국기로 원산지를 표시하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덴마크산이면서 건강에 좋은 유기농 식품을 찾기 위해서는 빨간 동그라미 마크와 덴마크 국기만 찾으면 되니 정말 간편하다. 뿐만 아니라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거나 다이어트 중이라면 녹색의 열쇠 구멍을 추가로 찾으면 되는 것이다.

녹색의 열쇠구멍과 덴마크 국기 이미지를 넣은 패키지 디자인
유기농 마크, 녹색의 열쇠 구멍, 덴마크 국기까지 모두 달고 있는 제품

마지막으로 덴마크 사람들의 소중한 먹거리인 육류 패키지를 살펴보면 한 가지 마크를 더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초록색의 하트이다. 육류 패키지의 전면에는 3개의 하트 그림이 있는데, 가축들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스트레스 없이 자랐는지를 표시하는 마크라고 할 수 있다. 가축들의 행복지수라고나 할까? 

이 마크는 일반 식품매장에서 판매하는 육류제품인 소, 돼지, 닭의 동물 복지를 나타내는 마크이다.

아래 왼쪽 사진의 돼지고기 제품의 경우는 하트 3개 중 한 개만 초록색이고 나머지 두 개는 흰색이다. 오른쪽 제품의 경우는 하트 3개가 모두 초록색이다. 초록색의 하트가 많을수록 돼지가 넓은 공간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생활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덴마크에서 육류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육류를 소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품질이 평가되지 않는다. 가축들의 행복지수나 건강상태가 품질에 포함된다. 따라서 사람들의 맛의 기준이 되는 지방의 함량과 고른 분포, 육질의 연한 정도가 아니라 가축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스트레스 없이 자랐는지가 제품의 품질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왼쪽 사진의 돼지고기는 좁은 우리에 가두어서 돼지를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 초록색 하트의 개수가 한 개밖에 없으니 말이다. 반면 오른쪽 사진의 돼지고기는 자유롭게 방목하면서 넓은 공간에서 스트레스 없이 자란 행복한 돼지로 만든 유기농의 돼지고기여서 하트 3개가 모두 초록색이다. 당연히 가격도 더 비싸다.

동물의 복지까지 신경 쓰며 바른 먹거리를 알리는데 도움이 되는 초록색 하트가 참 마음에 든다.

초록색 하트모양인 동물복지마크를 달고 있는 제품들

이처럼 덴마크는 제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소비자들과 투명하게 공유하고, 자신의 건강상태에 맞추어 건강관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디자인력이라는 그들 만의 강력한 무기를 잘 활용하고 있었다. 

덴마크의 시스템과 잘 디자인된 마크들을 알게 된 후 나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구매 실수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덴마크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제품들은 계속 다양해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려움은 더 가중된다. 제품이 다양해지는 만큼 제품 선택을 돕는 쉬운 시스템이나 명확한 기준들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디자인은 복잡한 말이나 글을 쉬운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패키지디자인에서 그런 디자인의 위력은 실력 발휘를 한다. 제품을 찾기 쉽게 해 주고, 제품의 강점을 빨리 인지하도록 도와주며, 쇼핑시간을 줄여준다. 

빨간 동그라미와 녹색 열쇠 구멍, 그리고 초록색 하트처럼 말이다.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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