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Aug 14. 2018

미디어, 편견을 조장하다

 어느 나라 사람일 것 같은데요?

한때 드라마를 보느라 약속도 잘 잡지 않을 때가 있었다. TVN의 <미스터 선샤인>을 보느라 그랬고 그 전에는 <도깨비>가 그랬다. 특히 <미스터 선샤인>은 <도깨비>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날려버리는 그야말로 신박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많은 연기자들 중에 이정현이라는, 츠다 하사를 연기한 배우에 대한 기사를 봤다. 영화 「박열」에서도 나왔다는데 잘 떠오르지 않지만, 중요한 건 어디서든 일본인 연기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오디션 없이 합류한 '괴물 신인'이라는 드라마 제작진의 수식어도 있었고 소위 잘 나가는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해서 주가를 올리기도 했다. 


그의 연기가 이토록 찬사를 받는 이유는 그가 '악랄하고' '잔인한' 일본군으로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악랄하고' '잔인한' 일본군(인)!!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일본인(군) 캐릭터 중에 딱 츠다 하사가 주목받은 이유는 바로 그가 연기한 캐릭터가 시청자가 원했던 일본군의 표상이라는 점 때문인 것이다. 이정현의 '츠다'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 주고 사과 없이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일제강점기의 일본군을 본다. -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군이다. 오독하지 말자.


명령에 따라야하는 위계 질서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려 미군과 시비 붙는 불 같은 성격, 할복이라는 명예로운 - 당시 일본군에게는 할복이 명예로웠다 - 기회에 주저하는 품성, 고자질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동료의 시체를 깔고 앉아 그의 월급봉투를 태연히 갈취하고, 게이샤로 위장한 의병 첩자를 저잣거리에서 머리채를 잡아 개 끌듯 휘돌리던 바로 그 모습이 한국인들이 원하는 '악랄한 일본군'이었던 것이다.


배우 이정현을 알지 못했던 시청자들이 쓴, 진짜 일본인인 줄 알았다는 댓글들을 보면서 씁쓸했던 것은 시청자들이, 최소 댓글러들이 생각한 '일본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연기자가 진짜 일본인이었다면 츠다의 재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문제에서 우리와 다른 교육을 받는 일본인 배우였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지. 배우 이정현 외에도 백정의 아들로 나오는 유연석, 그의 오른팔로 분한 윤주만 역시 시청자가 가진 일본인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뭐,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허구란 말이지.


우리가 일본군을 '츠다'의 이미지로 각인시킨 것처럼, 한국군을 그렇게 각인하는 나라가 있다. 


베트남에는 한국어로 된 위령비가 있다. 그곳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이름이 비석마다 몇 십명씩 적혀 있다. 또한 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이 계속 기록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여전히 많은 한국인은 무심하다.  피해의 역사를 강조해 온 한국 역사 교육이라서 가해의 역사는 차마 부끄러워 담을 수 없었던 모양인데, 요즘처럼 미디어 파급력이 큰 시대에 '유감을 표명'하는 게 아니라 보다 확실한 정리를 해야하지 않을까.


미디어는 늘 그랬다. 마치 그럴 것 같은, 혹은 미디어가 보고싶은 하나의 스테레오화 된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그린다. 이주 노동자는 다 동남아시아 출신일 것 같고(그래서 구소련연방국 출신의 백색 피부를 가진 이들을 보고 놀란다), 결혼이민자는 저학력의 시골출신일 것 같고(결혼이민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정보 접근성은 시골이 아닌 도시가 높다), 비행기를 타고 온 난민은 난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계층은 그 사회의 상위층이다. 중하위 계층은 외부로 피난을 가지 못한 채 displaced persons, 즉 자국 내 난민이 되며, 탈출한 난민은 자국내 난민의 10%에도 미치지 않는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방향성이 중요하다. 방향타는 한 가지 기준일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 환경과 개인의 경험이 만나는 곳에서 해석의 방향이 결정된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반영구불변적인 방향타가 된다. 경험은 계속 쌓인다. 미디어를 통한 간접 경험도 계속 쌓이므로 미디어를 어떻게 읽을에 한 자세는 다시 그 동안 쌓아온 미디어 간접 경험을 통해 결정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좀 더 쉽게 풀어내는 것이 '방송작가 출신의 문화연구자로서의 나'의 쓸모라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모든 것을 삼킨다. 그러니까 그렇게 무분별하게 삼켜진 걸 무심코 되새김질 했다가는 머저리가 되고 만다. 남들 먹는다고 따라 먹고, 비싸니까 과시하듯 인증샷 찍어가며 먹고, 맛집이라 덩달아 줄서서 먹고, 바이럴 마케팅에 속아 문화적 미각을 잃지 말자. 잘 보면 보이고 몇 번 먹다보면 안다. 누가 왜 MSG를 쳤는지, 팩트가 뭔지 말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내가 본 것, 당신이 본 것, 우리가 함께 본 것에 대해 같이 얘기해 보자.




이전 01화 문화다양성 이전에 그냥 다양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