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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ug 04. 2020

여성의 떠날 자유? 떠날 이유?

『여성들 이주하다』나나 오이시

우리 부모님은 고향이 부여이고 서울에서 만나 결혼하신 후에는 대전에 정착하셨다. 나는 학창시절을 대전에서 보냈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서울에서 결혼한 후 대전에 내려왔다.


나의 형제 자매들과 내친구들의 형제 자매들 역시 비슷했다. 태어난 곳과 살던 곳,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이 각각 달랐으며 그렇게 각기 다른 인생의 교차점들에서 새로운 인연들이 만들어졌고 곳곳의 점들에서 만난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그 순간을 지나가는 순간으로, 과거로, 그냥 흘려보내며 무심히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어떤 경험들이 잠깐 하는 일시적인 게 아니라 그 경험들이 각자의 삶에 영원한 흔적을 남긴다는 말을 하는 거다. 거기에는 '이주'라는 특별한 인생의 경로도 포함된다.


'여성들 이주하다'라는 연구서는 가볍게 들고 읽어지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레퍼런스가 가득한 빡빡한 연구논문도 아니다. 필리핀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의 3개국 출신자들 중에서 이주 경험을 가진 여성들의 인터뷰와 각국의 NGO 단체 활동가, 정부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추려 다양한 시각에서 읽을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연구서는 수많은 그래프와 도표, 숫자로 어지럽다. 물론 이 책도 일정 부분 그러하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수치들은 믿고(!) 거른다.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수치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논박을 위한 자료를 검토하기 위한 글읽기가 아님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책은 필리핀과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세 나라의 사례를 크게 나눠서 설명한다. 먼저 필리핀은 정부가 이주여성에 대해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가장 체계적인 지원을 하며 이주여성에 대한 NGO의 지원이 잘 발달되어 있고 이러한 사회적 지원에 힘입어 이주여성 스스로가 이주 현실을 주체적으로 잘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주에 대해 사회문화적으로 세 가지 사례 중 가장 긍정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두번째로 스리랑카의 경우에서는 정부의 모호한 입장을 지적한다. 정부는 여성의 이주를 막지도 지원하지도 않는다. 이주여성들은 먼저 이주한 여성들의 소개를 통해 알음알음 이주하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위험이 존재한다. 이슬람권 국가로 가사노동을 하기 위해 이주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공식적인 경로로 이주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먼저 이주 경험이 있던 '선배' 이주여성들로 꾸려진 NGO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인데 이마저도 한계가 있다.


마지막 방글라데시 이주여성의 경우에는 가장 열악한 처지이다. 이들의 이주 크기는 상대적으로도 소수이다.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은 마당 밖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소수만이 사회활동을 하기 때문에 아랍권 국가까지 가사노동을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간다고 해도 거의 6개월 정도의 임금을 수수료로 떼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연히 이주여성들의 교육 수준 자체가 매우 낮아 정부와 브로커의 지위 자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이런 극한 노동으로 떠미는 경우는 이들의 위치가 이 세 나라의 여성들 중 가장 열악하다고 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을까. 정부도, 사회도, 가족도 그 누구도 이들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으니까.


남성과 달리 여성들에게는 사회적으로 독특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다. 이는 여성들이 스스로 부여한 가치가 아니라 남성으로 대변되는 '사회'가 부여한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 체계가 잘 드러난 예로 필리핀의 '플로어 콘템플라시온' 사건이 있다. 


싱가폴에서 가사노동을 하던 필리핀 여성 플로어 콘템플라시온이 자신의 고용주의 아들을 살해했다는데 이에 대한 필리핀 당국의 적절한 사법적 개입 없이 순식간에 사형을 집행되어 버렸다. 그러자 일순간에 필리핀 남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박차고 필리핀으로 대거 입국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필리핀 남자들이 자국 여성들을 소중히 여겨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해외의 외국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여성'이 학대받거나 희롱당하는 사건에 대한 분노였다. 어느 국가든 '여성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 역할이다. 이러한 보호자의 역할은 국가로 표상되는 한 사회의 문화적 가치가 반영된 결과이다.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한반도의 반만년 역사에서도 수많은 외세 침략기 동안 반복된 여성들의 수난기, 고려시대 '환향녀'에서 '일본 위안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도 반복되었던는 인류의 역사다.


어느 나라의 이주 정책이 여성들에게 우호적인지, 그래서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보다 더 나은지 그런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이주'라는 현상 자체가 이제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과 이를 정부에서 통제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이러한 배경으로 낯선 이웃이 된 이들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여성도 남성도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모두. 다만 그 시기가 다를 뿐이고 이미 떠난 지 오래됐다면 잊었을 뿐이다. 농경사회도 아니고 내가 태어난 집에서 오늘도 살고 있는 이는 없지 않은가.

원하는 이들만 떠나면 좋겠지만 모험적이지 않은 이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존재하도록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시대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산재한 시대로 이행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모두 그렇게 집을 떠나 지금 여기 도착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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