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Nov 01. 2020

문화다양성 이전에 그냥 다양성

지금은 21세기,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고 교양입니다.

국내법에는 [문화다양성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이 있다. 이 법률의 용어 정의에서 문화다양성은 ‘집단과 사회의 문화가 집단과 사회 간 그리고 집단과 사회 내에 전해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을 말하며, ‘그 수단과 기법에 관계없이 인류의 문화유산이 표현, 진흥, 전달되는 데에 사용되는 방법의 다양한 예술적 창작, 생산, 보급, 유통, 향유 방식 등에서의 다양성을 포함한다.’     


보통 설명을 읽어보면 뭔가 감이 와야 되는데 당최 감이 안 오는 건 무슨 까닭일까. 일부러 모호하게 정리 아닌 정리를 한 것 같은 이 느낌.... 나만 그런 걸까?     


2001년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선언문에는 ‘문화다양성=인류의 공동 유산’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덧붙여서 ‘문화는 시공간에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 다양성은 인류를 구성하는 집단, 사회의 정체성, 독창성을 구현’한다고 정리했다. 생태 다양성이 자연에 필요한 것처럼 교류, 혁신, 창조성의 근원으로서 문화다양성은 인류에게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밝혔는데 압권은 그 다음이다. 문화다양성이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혜택으로 인식’해야 하는 필수불가결하다는 내용이다.     


2020년 문화다양성 수업에서 만난 아시아문화인권연대 이완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현재 한국의 학교법에는 무국적 아동이든 중도입국자녀 출신이든 상관없이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를 지켜주고 있다. 약 10여년 전부터 미등록이주노동자 가정의 자녀 등 출생신고를 할 수 없어 무국적 상태가 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가면서 이완 대표는 학교를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이 아이들이 지금 학교에서 잘 교육을 받으면 나중에 자기 나라에 갔을 때 친한파가 된다.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에 득이 되는 일이니 아이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해 달라.’     


당시에도 지금도 의무교육 학령의 아동은 학교장 재량으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으면 무국적아동들이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시절, 인권연대 대표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완 대표는 지금 후회한다고 했다. 왜 후회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지? 이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는 당연한 건데 학교 관계자는 이 아이들을 한국의 미래를 위한 도구로 본 거다. 한국 국적의 아이였다면 건강하고 밝게만 자라다오, 했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단지 무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국가의 이익을 도모해야 할 수단이 된 거였다.     


문화다양성은 유네스코와 국내법에서 말한 내용을 포괄하지만 현실에서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 일명 ‘소수자’라고 정의되는 집단에 속하는 카테고리다. 이들은 자신의 지향성 때문에 다수의 사회로부터 배제당하기도 하고 가시적 차이 때문에 차별받기도 한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차별하기 위해 차이를 만들어내거나,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지 알기 위해서 차이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공동 유산인 문화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성적소수자, 장애인, 난민, 결혼이민자, 무국적아동처럼 한번은 들어봤을 이들도 여기에 포함되지만 그 외에 혐오의 대상으로 호명되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톺아보는 것이 이해하기 더 쉬울 것 같다.     


여기에는 ‘여성’과 ‘비정규직 노동자’ 도 포함된다. 어떤 대상을 얕잡아보는 습관은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온다. 따라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사회적으로 묵인된 특정 계층에 대한 혐오를 들여다보는 일은 문화다양성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     


사람을 고쳐쓰는 거 아니라는 말은 타고난 성향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인데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타고난 그 성향이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이고 공동체에 위협이 될지라도 그 성향의 사회적 표출이 용인되는 사회와 금기되는 사회는 다르다. 그 차이는 그 사회의 ‘분위기’에 달려있다. 강력한 법적 처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공기처럼 퍼져있는 분위기가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이 글은 매년 덧붙여지고 새로 쓰고 다듬어갈 예정이다. 여기는 세상 그 어디보다도 역동적인 곳이다. 우리는 유럽이 당연히 실패한 동화주의가 아닌 우리만의 다문화주의를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에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기를.     


2020.11.1.

Write by Hannha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