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 - 너는 살아야지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종기는 청와대 파견을 마치고 검찰로 돌아왔다. 지수도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종기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힘들어했다. 검사로 있을 때는 일을 재미있어했었는데 청와대에 있으면서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서초동으로 돌아간 종기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그날 아침에도 종기는 지수가 해 준 아침밥을 한 그릇 다 비우고 웃으며 집을 나왔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응 몸이 가벼운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아. 이따 오후에 백화점으로 나올래? 나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거든 오후 일찍 만나서 밥 먹고 영화 보러 가자”


지수는 평일에 종기와 데이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었다. 주말에도 바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평일에 저녁을 먹고 영화까지 볼 수 있다니 지수는 신혼여행을 가는 것 마냥 좋았다.


“어디야? 난 식당에 와있어”

“벌써 왔어? 다 왔어 여기 정문이야”


지수가 늦은 것은 아닌데 종기가 일찍 도착해 있었다. 지수가 종기의 핸드폰을 받으며 백화점의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벼락이 내리치는 듯 ‘쿠우웅'하는 소리가 들리며 지수의 눈앞이 하얘지고 몸이 튕겨져 나왔다.


눈을 뜬 지수는 신발이 벗겨진 채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는데 바로 설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지수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아가씨!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돼요. 어서 피해야 해요!”


누군가 지수의 팔을 잡아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지수는 튕겨나가듯 무너진 백화점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수가 사납게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저기 내 남편이 있어요.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무너진 백화점 아래 어딘가에서 흙더미에 깔린 종기가 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종기는 흩어진 목소리로 가늘게 지수를 불렀다.


“지수야 ~ 여기 오면 안 돼 너는 살아야지 ~”


종기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지수는 벽을 보고 누웠다. 의자든 방바닥이든 어디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있을 수도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지수의 시간과 공간이 완전하게 닫혔다. 벽에 붙어 있어야 했다. 빈공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이 벽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같이 죽자! 지수야!”


서희가 지수의 방 문고리를 잡고 무너졌다. 서희는 방 안에서 벽을 보고 움츠려 있는 지수에게 매끼 음식을 들이밀었지만, 지수는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서희는 며칠째인지 숨소리도 없는 그 무모한 시간 속에서 생살을 쥐어짜며 울부짖었다.


“내가 안된다고 했잖아! 내가 안된다고 했잖아! 내가 안된다고 했잖아!”

“지수야! 같이 죽자! 너 죽고 나도 죽자! 지수야 ~”


종세는 두 여자의 차갑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담배만이 종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종세는 담배연기가 숨으로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다. 심장이 타는 냄새가 온 내장을 뒤집었다. 그래도 종세는 울지 못했다. 벽에 들러 붙은 지수의 작은 등이 종세의 심장을 천 갈래로 찢었다.


언젠가부터 서희가 지수의 방문 앞에 주저앉아 혼자 말을 했다.


“내 잘못이야. 그때 스미스를 따라서 미국으로 갔어야 했어. 이 지긋지긋한 땅에 미련을 둔 내가 미친년이야”

“엄마 손을 잡고 만주 벌판을 헤맬 때도, 피난길에 일주일을 피죽도 못 먹고 걸을 때도 이랬어. 이 거지 같은 땅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나한테 밥을 준 놈은 미국 놈이었어”

“난 왜 이렇게 오래 사는 거니 왜 죽지도 않는 거니 몇 백 년은 산 것 같아. 이제 그만 살고 싶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며칠이 지났는지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죽음같은 시간 속에서 작은 소리가 있었다.


“엄마~”


지쳐 넋이 나간 서희는 듣지 못했다. 종세가 들었다.


“지수야! 엄마 불렀니? 배고프니?”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종세가 지수를 붙잡고 물었다. 지수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건조하게 벽을 타고 들릴 듯 말 듯 가늘게 종세에게 전해졌다.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지수의 말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종세는 금방 알아들었다. 종세의 동공이 커지고 지수의 어깨를 잡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 종세가 지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이제 우리 살았다. 지수야~ 종기가 널 살렸다. 내 아가~ ”



이전 02화1993 - 그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