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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Sep 23. 2016

여행의 목적은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린 각자의 이유 때문에 혹은 이유 없이 길을 떠난다

광화문을 지나는 길이었다. 서울주교좌성당의 붉은색 지붕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 체코에서 카를교를 건너며 바라봤던 프라하 시내의 빨간 지붕 건물들이 떠올랐다. 저녁노을과 붉은색 지붕이 하나로 포개지던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던 것 같다.


밀도 있는 여행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행(旅行).


여행은 인간의 본능이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욕망은 우리 유전자 안에 각인돼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우린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여행길에 오른다. 아니, 아무런 이유 없이 길을 떠나기도 한다. 인류 문명사는 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박한 현실 탓에, 일상의 버거움 때문에 여행에 대한 욕구를 억누른 채 살아갈 뿐이다.

 

삶의 터전을 잠시 떠나는 건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여행자는 낯선 길에서 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풍경을 만나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마주하기도 하고, 운전할 때 백미러(후사경)를 통해 지나온 길을 살피듯 삶의 궤적을 슬며시 되짚어볼 수도 있다.


후지와라 신야라는 일본 작가는 여행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여행지에서 날것의 풍경을 건져 올려 기록하는 작가로 유명한 그는 아무런 정보 없이 훌쩍 길을 떠날 것을 권유한다.


"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또한, 눈으로 얻는 정보를 경계하고 본질을 보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인도 여행을 할 때 갠지스 강에 대한 지식을 사전에 공부하고 가는 게 도움이 될까요?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겁니다. 때론 백지상태에서 아기의 눈으로 바라보세요. 그래야 본질이 보입니다.”


'여행'은 분명 현대인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단어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에 가는 행위를 일컫는다. 하지만 이 정도 설명으로는 여행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단어와 문장의 수집가로 불리기도 하는 소설가와 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봄 직하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폴 발레리)


밑줄 그을 만한 문장들이다. 이들의 이야기처럼, 우린 목적지에 닿을 때보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더 소중한 것을 얻곤 한다.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 모른다.


그래서 난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비행기보다는 열차에 몸을 싣는 편이다. 기차를 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찬찬히 응시할 수 있다. 이동의 과정을 음미하면서 멀어지는 것과 가까워지는 것을, 길과 산과 들판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어디 여행뿐이랴. 인간의 감정이 그렇고 관계가 그러한 듯하다. 돌이켜보면 날 누군가에게 데려간 것도, 언제나 도착이 아닌 과정이었다. 스침과 흩어짐이 날 그 사람에게 안내했던 것 같다.


돌연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대학 4학년 때다. 동아리방에 모인 졸업반 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각자 업으로 삼고 싶은 직업을 늘어놓았다. 종종 언론에서 발표하는 대학생 취업 선호도 분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한 녀석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다 “난 여행을 직업으로 할 거야”라며 조금 생뚱맞은 대답을 내놓았다.


우린 녀석의 계획을 듣고는 “하하, 그래. 맘대로 해. 대신 여행지에서 엽서나 보내” 하고 껄껄대며 웃었다. 그때 친구들이 터트린 폭소는 녀석의 계획을 깎아내리는 비웃음이 아니라 오히려 너만큼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당부와 격려의 환호성이었던 것 같다. 우린 친구의 성이 정 씨라는 점에 착안해 ‘인디아나 정스’라는 별명도 붙여주었다.


몇 년 뒤 친구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돈이 모이면 휙 하고 파리로, 프라하로 떠난다고 했다. 그곳의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고 했다. 녀석은 ‘난 충분히 잘 살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며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다들 꿈을 잃어버렸다고 자조하기 분주한 세상이지만, 그 친구만큼은 본인이 내뱉은 말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녀석은 말했다.


“기주야, 난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아. 꽤 오래전부터….”


친구 녀석과 짧은 통화를 마친 뒤 나는 '여행'과 '방황'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했다. 둘 다 '떠나는 일'이라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두 행위의 시작만 비슷할 뿐 마지막은 큰 차이가 있다.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행여 여행길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다 해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방황이 끝날 무렵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훗날 그 방황은 꽤 소중한 여행으로 기억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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