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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에서 만난 대한민국

by 최 콩

미국 버지니아 집에서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미국수도 워싱턴 DC가 나온다. 미국 땅이 워낙 넓다 보니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도 수도를 못 와본 사람들도 많을 텐데 워싱턴 DC가 집에서 이리 가까이에 있다는 건 미국생활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그간 워싱턴 DC를 방문하면서 미국수도에서 만난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주미 대한 제국 공사관에서 만난 대한제국

트럼프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에서 북서쪽으로 20여분 걸어가면 주미대한제국공사관(Old Korean Legation)이 나온다. 이곳은 19세기 조선과 대한제국의 공식 외교 공관으로 사용 고종은 1888년 당시 거금 이만 오천 달러에 이 건물을 매입하여 미국과 상호 우호적인 교류를 위한 공사관으로 꾸렸다고 한다.

공사관 건물 입구 위쪽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반갑다.

그 당시 워싱턴 DC 한 복판에서도 상당히 고가인 이 건물을 매입한 고종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 근대화의 격변의 시기에 얼마나 절박한 마음이었을까?

1층 입구에 들어서자 태극기가 보인다. 태극기 아래 방명록에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 국인 직원의 내에 따라 옆방으로 가서 6분 내외 공사관 소개 영상을 보았다.


19세기 워싱턴 DC에 세계 32개국의 공사관이 있었는데 이곳 대한제국 공사관이 유일하게 예전 모습대로 전하고 있는 공사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공사관이 처음 생긴 1888년부터 지금까지 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진 않았다. 우리 역사의 뼈아픈 순간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긴 후 공사관의 업무는 그해 중지되었고 본은 우리의 이 건물을 1910년에 단돈 10달러에 아 버렸다고 한다.

태국기가 펄럭이는 공사관 엽서

한일강제합병 이후 미국에 있는 교민들은 태극기가 그려진 공사관 엽서를 제작하여 제의 만행을 알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사관은 언제 시 우리 품으로 오게 되었을까? 무려 한 세기가 지 2012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매입하여 2년의 고증작업과 3년의 복원 공사를 거쳐, 2018년부터 반인에게 공개되고 지금과 같은 박물관으로 영되고

있다 한다. 1과 2층은 19세기말 공사관 시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3층은 관련 사료에도 당시 모습이 남아있지 않아 한미 외교사와 공사관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공사관을 둘러보자. 1층은 외교활동과 공사관 기능중심의 응접실, 식당, 집무실이 있고 2층은 대한제국 외교관의 생활공간과 가족 침실이 있다.

손님 맞이방인 1층 객당의 모습

19세기말 토리아 양식에 따라 그 당시 모습과 90퍼센트 가까이 복원을 하였다고 하는 공사관 첫 손님맞이 공간인 객당의 분위기는 반적으로 서양식인데 중간중간 우리의 백자 항아리, 소나무 병풍, 태극기 수가 새겨진 쿠션 등의 소품으로 사관으로서의 위엄과 대한제국의 기품이 느껴는 공간이었다.

공사관 업무의 집무실인 정당 벽면의 고종 초상화

외교문서의 수발신 등 실질적인 집무실이었던 '정당'에는 고종의 어진(초상화)이 있었다. 어진을 모셔 두었던 이유는 이곳이 대한제국 대표하는 외교공간임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자주독립국가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도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던 붓과 이 그려진 연필꽂이 등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대한제국 외교관의 가족공간인 2층으로 올라가 보자.

무궁화를 형상화 했다는 계단 카페트 모형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 모형 카펫이 깔린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자 사와 가족이 사용했던 침실 있다. 런데 실 침대 끝부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고무신 두 켤레가 눈에 어온다.

침실(좌), 나란히 놓인 고무신 두켤레(우)

1층에서 6분짜리 영상을 보 이미 껏 말랑해진 나의 마음은 나란히 놓인 남녀 한쌍의 고무신을 보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싱턴 DC 한복판에 놓인 고무신이라...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던 조선의 공사는 고국의 가족, 친지와도 게 연락할 수 없는 도 설고 도 설은 이국만리 미국 땅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의 나는 미국에서 김치 등 한식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럴 수도 없었을 텐데 얼마나 한식이 그리웠을까? 지금이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그 당시 조선은 변방의 작디작은 나라로 반인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텐데 나라의 주권이 위협받는 그 시기에 외교관으로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라는 생각이 닿자 공사 부부가 신었을 듯한 저 재현된 고무신에 달픔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껴졌다.


3층의 전시공간을 천천히 둘러본 후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한쪽 벽면에 붙여진 자 서체가 눈에 들어온다. 침 그곳에 서 계시는 직원분에게 묻는다.

한미친선평등호조: 한국과 미국은 친하고 평등하게 서로 돕는다

" 이 글씨는 누가 쓰신 걸까요?"

" 작년 9월에 우리 공사관이 사적지로 등재가 되었어요. 한국문화유산이 미국에서 국가 사적지로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인데요. 그 기념으로 김 구 선생님이 1949년 쓰신 친필을 기증받아 이곳에 걸어 두게 되었습니다."


나의 눈앞에 백범 김 구 선생님의 친필이 있다니.. 이것도 놀라운데 쓰신 8개의 글자 중에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김 구선생님의 방점은 왠지 이 "평등"이라는 두 글자에 있지 않았을까..라고 히 선생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DC에서 한국전쟁을 만나다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기념관에서 산책하듯 도보로 5분쯤 걸어가면 한국전쟁참전용사 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 나온다. 공원처럼 실외에 꾸며진 이 기념관은 6.25 한국전쟁 정전 42주년이 되던 1995년 한국정부의 후원을 받아 미연방정부에서 립하였고 한다.

한국전쟁 기념관 안내 표지

이제 기념관(공원)을 둘러보자.

기념공원은 실물크기의 19명의 병사들이 한국전쟁 중에 정찰하는 모습을 조각한 병사 조각상과 그 뒤편에 검은 화강암벽에는 병사들의 모습을 새겨 넣은 벽화(Mural Wall)가 있다.

정찰하는 19명의 병사와 뒷편의 화강암 벽화

왜 병사는 19명이었을까? 이 숫자에는 놀라운 상징이 숨겨져 있다. 조각상 19명과 뒤에 벽에 반사된 또 다른 19명, 도합 38명이 북위 38도선인 남북 북단을 상징하는 의미로 제작이 되었다고 한다. 가의 의도를 알고 보니 우리보다 더 우리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역사가 우리만의 역사는 아니구나.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출신인 이 미국 조각가 놀라운 상징로 이곳은 단순히 전쟁을 기념하는 공간이 아닌 작가의 예술성과 역사성이 함께 느껴지는 공간 되었다.


그 옆 추모의 벽 (Wall of Remembrance)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36,634명과 카투사 7,17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렇게 전 세계 많은 사람이 한국전쟁에 참여서 전사했구나.. 오늘의 우리의 평화는 우리 선조뿐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에게도 빚을 진 것이었구나 또다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FREEDOM IS NOT FREE(추모의 벽 글귀 )


세계가 인정한 우리 작가님 '한 강'


DC에서 만난 대한민국은 달프고 아픈 순간만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봉준호 감독은 번역이라는 1센티의 한계만 넘으면 세계로 나갈 우리의 문화가 무궁무진하다고 하였다. 낙엽이 예쁘게 진 어느 가을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 문화원(Korean Cultural Center Washington, D.C.) 근처를 지나다가 자랑스러운 한 강 작가님 플래카드를 보았다. 아드님과 차 한잔을 마시며 노벨상 수상을 자축하셨다는 작가님처럼 소박한 플래카드

노벨상 수상 기념 플래카드

플래카드에는 노벨 문학상 선정사유가 적혀 있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으로 한국 작가 한 강에게 수여됩니다."


이보다 더 국뽕이 차오르는 순간이 있을까?


이 밖에도 국립 인디언 박물관(National Museum of the American Indian)에서 만난 우리나라 과자 인디언밥을 만났던 귀여운 순간과 여타 다른 박물관내에서 한글 안내 책자를 받은 세종대왕님께 감사했던 순간, 농구, 야구 등 어떤 행사장에서든 반드시 한 곡이상 들려오는 케이팝 만난 순간 등을 일일이 모두 기록한다면 오늘의 글이 끝맺음을 못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우리 대한민국은 먼 미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귀적(貴跡)이 있었고 이런 나의 작은 글 한 편에 담기에는 너무 많은 스토리를 고 있으니까. 리 딸의 말처럼 좌표를 잘 찍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러키비키 하다는 말로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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