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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선 May 03. 2024

인연은 어렵다

'평생을 함께할 내 편을 만나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힘들 땐 서로 보듬고,

기쁠 땐 같이 웃을 수 있는

누구보다 소중한 평생 내 편.

귀한 걸음 하시어 축복해 주십시오.

언제나 오늘의 이 기쁨을 간직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2015년 11월 우리 결혼식 청첩장 초대 문구이다. 당시 내 나이는 마흔, 와이프는 서른여섯이었다.


2015년 결혼 초혼 평균 연령이 남성은 32.6세이고 여성은 30.0세이니 우리는 평균 대비 6.7년은 늦은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불혹을 넘기지 않고 결혼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연이라는 게 어디에 꼭꼭 숨어있는 것인지 그동안은 그렇게도 안 나타났다. 서른여덟이 되고서부터는 이거 가만히 인연을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적극적 인연 찾기에 돌입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소개팅을 두 번씩 바로 같은 장소에서 이어서 해댔다. 그렇게 쉴 새 없이 소개팅을 일 년 정도를 하다 보니 나중에는 만난 사람 이름도 헷갈리고, 어디서 만났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애프터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헷갈릴 지경이 되었다. 나는 생각 끝에 회사에서 공정 Check Sheet 업무 하듯이 소개팅 장부를 만들었다. 일명 '팅 Check Sheet' 였다.


'팅12번 / 이름:아무개 / 일자:9월14일 / 장소:강남역 / 느낀 점:나의 03년식 아반떼 차를 보고 기겁을 함(경제관념이 투철한 듯)'


'팅 35번 / 일자:3월 1일 / 장소:강남역 / 느낀 점: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나고 물어보길래 그게 뭔지 몰라 술안주로 가오리를 가끔 먹는다고 말함. 그 후로 연락 안 됨 (내가 무식했음)'


매주 일 하듯이 빠르고 열심히 팅 Check Sheet를 채우리라 마음먹었다.


만날 순서가 되어야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이라면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후딱후딱 보내버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팅 40번을 넘었음에도 나의 인연은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다가 서른아홉 어느 날 나랑 동갑인 회사 동기 용창이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혼식 사회를 봤던 또 다른 내 동기인 열진이가 신랑, 신부 퇴장 직전에 갑자기 마이크를 다시 잡더니 하객들에게 소리쳤다.


"퇴장 전에 하객분들께 한 말씀만 드리려고 합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자 모두 저 뒤를 보십시오. 저 에어컨 옆에 서 있는 삐쩍 마른 남자가 제 회사 동기입니다. 신랑 용창이와 동갑인데 저 친구는 아직도 여자 친구 하나 없습니다. 부디 하객분들의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소개팅 하나씩만 시켜 주십시오."


그 후 용창이 장모님께서 같은 동네 주민이었던 지금의 내 와이프를 소개해 주었다.


팅 Check Sheet에는 없는 인연이라 아주 뜻밖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만남이었기에 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인연이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했다.


둘 다 맞벌이를 했던 우리는 경기도 분당에 신혼집을 차렸다. 중학교 선생님인 와이프는 서울로 출퇴근했고, 액정 만드는 회사의 품질 엔지니어인 나는 천안으로 출퇴근하였다. 회사에 늦지 않게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새벽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매일 새벽 호사를 누렸기 때문이다. 와이프는 출근하는 나를 위해 아침상을 매일 차려주었다.


풀숲에서 알을 캐야 한다는 방목 농장 산 초란 계란 프라이 하나와 노란 속살에서 김이 모락모락 한 톡 쪼개진 고구마 반 개.


여기에 든든함을 더해 줄 시원한 미숫가루 한 컵.


마지막 입가심으로 길쭉한 비타민 한 알까지 챙겨주었다.


십수 년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그 누구한테도 새벽 시간에 와이프한테 아침밥을 얻어먹고 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동료들은 나에게 새벽마다 왕의 밥상을 받아먹는다고 부러워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알콩달콩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그리고 1년 여가 지났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갑자기 우리 가정에 이상한 이유를 들이대며 불행이라는 놈이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난임이었다.


와이프에게는 그 6년 동안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기에 난임이라는 것이 큰 불행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불행이라는 표현보다는 애태움, 기다림, 바람, 안타까움이라는 말을 빌려 씀이 더 맞을 것 같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 있는 와이프도 팅 40번을 넘기며 아주 어렵게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없는 내 새끼와의 인연이 그리 호락호락 할리는 없다. 그렇기에 어려운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와이프와의 만남을 위해 스쳐 가는 인연을 후딱후딱 흘려보내며 때를 기다렸듯이 내 새끼와의 만남도 그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이다. 인연을 찾기 위해 팅 Check Sheet를 써 내려간 것처럼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했는지 차근차근 체크를 하자'


당시에 나는 일단 난임이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다. 오히려 불임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지금은 누가 불임이라고 말하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 배려심 없는 용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이 부끄럽다.


나는 일단 난임이란 무엇인지, 그 용어의 정의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난임의 정의 : 보건복지부(출산정책과) 모자보건법_제 2조]


'난임'이란 부부(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경우를 포함한다.)가 피임을 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부부간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지나도 임신이 되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한다.


                     ( 신혼여행지 하와이 어느 성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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