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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선 May 03. 2024

난임 병원

마치 중간고사 기간, 재수생들이 몰려있는 독서실 같았다. 군대 제대 후 복학 전까지 독서실 총무를 했을 때의 그 첫날 느낌과 비슷했다. 처음 난임 병원을 갔을 때의 내가 받은 인상이다.


병원 내부는 진료실인지 검사실인지 통로 좌우로 많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방들 앞에 있는 모든 자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결의에 차 있는 듯하다.


수납실 앞자리에는 시험지 정답 맞히는 커플처럼 머리를 맞댄 채 심각하게 무언가를 보고 있는 부부도 있다. 남편인 듯한 어떤 사람은 전날 시험 망친 학생처럼 잔뜩 구겨진 얼굴로 초음파실 앞을 왔다 갔다 한다. 구석에 있는 어느 검사실 앞에는 마치 독서실 남학생 실처럼 남자들만 시꺼멓게 모여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북적함에도 난임 병원은 이상하게도 말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일행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독서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서로 속닥거리고 있었다. 간혹 독서실 휴게실에서 수다 떠는 여학생들처럼 뭐가 그리 신났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을 옆 사람과 조용히 나눠 갖는 부부도 보였다.


난임 병원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아니 엄숙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간혹 '딩동딩동' 수납실 번호표 뽑는 소리만 마치 적막한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그 적막감의 이유는 몇 년 후에나 알게 되었다.


산전 검사를 위해 와이프 손에 이끌려 난임 병원을 처음 갔던 날이었다. 신설동에 있는 ㅁㄹㅇ라는 병원이었다. 와이프는 난임 판정을 내린 그 이름 짧은 병원에서 했던 검사를 다시 했다. 나는 남편 산전 검사라는 것을 받았다.

먼저 소변 검사, 피검사 등 기본적인 검사를 받았다.

다음에는 의사가 진료실에서 문진 했다. 의사는 신체적 이상 여부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물어보더니 갑자기 바지를 내려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비닐장갑을 낀 손이 쑥 들어오더니 고환을 만졌다. 나는 놀란 토끼 벼랑바위 쳐다보듯 의사를 바라봤다. 의사는 남성 난임의 가장 큰 원인인 '정계정맥류' 여부를 확인한다고 했다. 그리고 더불어서 고환의 '용적률'을 측정한다고 했다. 아파트 용적률은 들어봤어도 이는 처음 들어본 용어였다.

다음은 정액 검사였다. 간호사가 3층에 있는 비뇨 검사실 앞으로 안내했다. 거기는 바로 독서실 남학생 실 같은 그곳이었다. 왜 이 구역에만 남자들로만 우글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그 틈바구니에서 같이 우글대며 기다렸다. 이윽고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눈금이 쫙쫙 있는 뚜껑 달린 머핀 컵처럼 생간 통을 내주었다. 거기에는 내 이름이 적힌 레벨이 붙어있었다. 그리고는 뒤 쪽에 있는 중문을 가르치며 받아오라고 했다. 중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둑어둑한 복도가 나왔고 고시원처럼 다닥다닥 붙은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이 중 문 열린 방으로 들어갔다. 입구 정면에는 47인치 TV가 있고, 그 옆 벽면에는 헤드폰이 걸려있었다. TV 선반에는 리모컨이 있고, 그 옆에는 노래방 마이크 커버처럼 생긴  것이 있었다. 감각적으로 헤드폰에 씌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병원이라 그런지 위생 관념이 철저했다. 좌측에는 손 세정제  여러 개가 놓여있는 세면대가 있었다. 그리고 TV를 앉아서 보라는 것인지, 누워서 보라는 것인지 헷갈리게 생긴 침대 같은 널찍한 소파도 있었다. 소파는 창호지 같은 종이가 차량 가림막처럼 씌워져 있었다. 그 위에 앉던지 눕던지 하라는 것 같았다. 헤드폰을 쓰고 TV를 틀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미국 영화였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채널은 한 개 짜리였다. 대사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머핀 컵 뚜껑을 잘 닫고 검사실 선반에 제출하면 끝난다. 검사실은 영화 틀어주는 방들의 맨 앞에 있는데 마치 독서실 총무실처럼 작은 미닫이 식 창문이 있었다. 이 창문으로 손만 뻗어 머핀 컵을 수거하지 않을까 했다. 또한 특이한 점은 서로 얼굴뿐만 아니라 손도 마주치지 않게끔 배려해주는 장치도 있었다. 미닫이 창문 앞에는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술집 바텐더를 부를 때 나오는 은색 테이블 콜 벨이 있었다. 머핀 컵을 제출 후 이 콜 벨을 쳐줘야 한다. '땡'

그러면 남편 산전 검사의 모든 것이 끝난다.


난임 병원에서의 그러한 검사들을 처음 했을 때의 기분은 군대 끌려가는 그 느낌처럼 아주 싫었다. 후딱 시간이 지나 이 상황들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6년 동안 난임 병원을 계속 가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와이프의 시험관 아기 시술, 인공수정 등 체외수정 시술 때마다 남편인 내가 난임 병원에서 한 시술은 저게 다였다. 이를 시술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남편들은 산전 검사 때와 체외수정 시술 때의 차이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채혈은 염색체 검사를 제외하면 거의 안 한다. 그리고 용적률 측정하는 문진은 산전 검사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머지는 병원마다의 차이점 그리고 세월에 따라 변한 것 몇 개 빼고는 거의 비슷하다.


병원마다 다른 것으로는 머그 컵의 모양, 크기가 각기 다르다. 규격이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병원에서는 얼핏 보니 소변 검사통과 동일한 통이었던 것 같았다.


또 다른 점으로는 틀어주는 영화도 같은 이름의 병원이라 하더라도 분원마다 달랐다. 서울권 병원은 미국 영화이고, 경기도 이남권 병원은 일본 영화만 틀어줬다. 채널은 모두 한 개짜리였다.


그리고 세월에 따라 변한 것으로는 검사실 앞 벨의 형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땡'하는 실버색 콜 벨 형태에서 언제인가부터는 "삐'하는 초인종 디지털 벨 형태로 바뀌었다.


남들은 내가 별 걸 다 기억한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일부러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난임 1, 2년 차에는 그 어색한 상황 하나하나가 너무 싫어서 기억나는 것이고, 난임 3, 4년 차에는 전과 달라진 상황이 있으면 그게 어색해서 기억나는 것이고, 난임 5, 6년  차에는 익숙해서 편안한 상황이 있으면 그게 어색하지 않음에 놀라서 기억나는 것이다.


아마 나는 난임 병원의 기억이 잊히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난임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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