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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서점기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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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Oct 16. 2021

도면, 도면, 도면

마음이 닿은 곳_서점

# 02


서점에서 일한 뒤부터는 책상에 오래 앉아 근무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밀려들어오는 책과 씨름을 하다 보면 책상에 앉을 새도 많이 없거니와 책상 자체가 의자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오픈 업무 담당으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약 한 달여의 기간 동안, 정말 엉덩이에 뿔이 날 정도로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도면, 도면, 도면


딱히 어려운 도면은 아니다. 공간이 있고, 면이 분할되어 있고, 평수가 표시되어 있다. 들어올 서가나 인테리어 집기의 크기도 거의 정해진 상태였다. 현장 실사는 했어도 그 장소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므로 정문과 후문, 같이 들어가는 카페의 크기, 사람들이 들어오는 동선을 대략적으로 가늠한 뒤 서가 분류를 시작했다. 개인서점이었다면 좀 더 창의적으로 공간분할을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기업형이니 다른 지점들과 완전히 다르게 분류를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서점에서 대분류가 크게 바뀌는 경우는 없으므로 분류를 나누어 배치하는 작업은 되도록 평이하게 하게 되었다.


A~F로 구역을 나누고 명칭을 정하는데 중형 정도의 서점 크기에, 들어서는 장소의 주변 환경도 고려했다. 더 큰 크기였다면 구역도 늘어났겠지만 필요 없는 동선이 늘어날 수도 있어 지도상으로 보이는 동네 환경을 우선으로 반영하여 나누게 되었다. 대략적인 큰 위치를 잡고 나면 그다음은 중분류, 세분류에 해당하는 서가를 구성해야 한다.


서가를 구성하는 기준은 담당자마다 다르겠지만, 서점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찾는 서가 외의 구성도 되도록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분위기로 하고 싶었다. 책의 세분류는 담당자의 판단에 의존할 때도 많기 때문에 서점마다 분류에 의한 위치가 다를 수 있다. 그래도 손님이 쉽게 찾을 수 있고 더불어 신입직원들이 헛갈리지 않도록 최대한 '딱 봐서 알만한' 서가명을 붙여 오픈전 책이 입고되어 밀려들어오기 시작할 때 분류를 인지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오차를 가능한 줄이고자 했다.


사실, 다 구성하고 보니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이한 구성이라 좀 더 욕심을 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이한 구성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픈점이다 보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진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표가 났는지, 주변 선배님들이 조언으로, 어차피 기본만 해 놓고 만들어 가면 되니 처음에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는 말을 해주시기는 했다. 다소 아쉬웠으나, 많이 특이하지는 않으며 보기에 불편함이 없는 서가. 간단해 보이지만 처음에는 그 방법이 최선일 수 있다.


움직이는 책


서가를 구성하고 컨펌을 받는 과정에서 서가 배열이 바뀌기도 한다. 전체를 보는 눈을 더 키워야 하겠구나 하는 겸허의 생각도 잠시, 수정해야 하는 서가 위치번호와 그에 따른 서가명, 생각했던 책 배열이 흩트러지는 경험은 상당히 귀찮은 것이었다. 정확히는, 조율 과정보다, 그 결과를 재 표기해야 하는 손가락 움직이기가 귀찮은 것이었다. (이런이런..)


몇 차례의 컨펌 과정이 끝나면 주문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오픈이기 때문에 전산주문으로 하지 않고 목록을 파일로 만들어 보내주어야 하는데, 거래하는 총판과 주문 시기를 정하기 이전에 목록이 끝나 있어야 일이 쉽게 돌아간다. 현재 주문 목록에 있는 책들이 주문 시기가 되었을 때 안 들어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예비 목록이나 대체할 수 있는 베스트 도서 목록 등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오픈 시 서가가 텅텅 비어있는 극악의 경우를 접하고 싶지 않다면 예비목록과 실 주문이 들어가기 전까지의 체크는 필수다. 주문 이후에도 총판에서 들어오는 책의 양이 주문 부수와 엇비슷한지 체크하고 없다 싶으면 2-3차까지 재주문을 넣어야 한다.


구성해 놓은 서가에 들어갈 책의 양을 예상하여 서가 별 목록 리스트를 만들었다. 서가 별 들어가는 리스트에 넣고 싶은 책과 진열 형태까지 생각하며 세심하게 작업을 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게 놔두지를 않는다. 오픈 시에 들어오는 책의 양은 서점의 크기나 진열 형태에 따라 다른데, 양으로 승부하는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 소량으로 움직이는 형태도 아니었기에 일반도서의 경우 최소 2만 부 이상은 목록 준비를 해야 했다. 기존 지점의 자료를 바탕으로 추가하거나 빼는 방식으로 최대한 작업을 간단하게 하는 방향으로 했다. 파트별 담당자가 있거나 같은 직장의 경험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일을 나누어서 했을 텐데, 모든 초기 작업을 혼자 하게 되다 보니 작업을 간단화시키는 일은 필수였다.


서점에 들어오는 책은 일반도서와 학습, 수험서 등으로 나뉜다. 학습이나 수험서는 취급하지 않는 독립서점들도 많이 있지만 일반 개인서점이나 기업형의 경우는 다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일반도서는 목록을 만들어 주문하고 학습과 수험서의 경우는 해당 총판에서 주는 양을 그대로 받는 경우가 많다. 학습이나 수험서는 단계별로 나뉘고 시리즈별 세분화 된 것이 많아 일일이 목록으로 만들기에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대략의 목록 준비가 완성되어가면, 진열상태를 어찌할 것인지도 머릿속에 새겨 넣거나 메모를 해두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책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입고 등록작업을 하며 생각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나의 경우에는 미리 생각해 둔 것이 꽤 큰 도움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책을 이 서가 저 서가로 움직이며 어떤 방식이 좋을까, 무슨 책을 추가하고 뺄까에 몰두하다 보면 책을 움직이는 마법사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유년시절부터 꽤 많은 판타지를 본 덕분이리라.


그즈음 현장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가끔 방문하여 기본 인테리어도 마무리되지 않은 어두컴컴한 시멘트 공간에서 멍하니 있는 것도 나름 추억이 될만한 경험이었다. 나무, 종이 향보다 축축한 시멘트 냄새가 나던 이른 봄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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