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퇴사기 #5
얼마간의 휴식기를 거친 뒤 입사한 C서점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중형서점이었다. 나름의 힘든 점은 있었지만 그나마 다녔던 서점 중 가장 평화로웠던 곳이었다. 책 보유량이나 입고되는 양이 적지는 않았으나 B서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입사 시 해당 지점의 점장님보다 경력이 많았던 탓에, 맡은 파트가 학습, 수험서, 외국어, 아동 등 신규 서점에서 신입 보다 경력직이 맡으면 더 좋은 코너를 맡은 것이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었다. 해당 파트들은 시즌별 반복되는 요소가 많고 특정 주제를 가진 큐레이션보다는 모음진열 형태가 더 어울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동 파트의 경우는 나이대에 맞는 이슈를 적용하거나 작가별, 계절별 그림책 진열 혹은 해당 지점에서 통합 큐레이션 진열 시, 주제에 해당되는 도서가 있을 경우는 참여가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통합 큐레이션의 경우 점장님이 맡아 진행하셔서 파트별 큐레이션이나 단순 모음 진열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기본 인테리어가 예쁘고 큐레이션 업무를 어깨너머로 많이 배워볼 수 있었던 곳이라 좋았다. 서점에서의 경력은 짧았지만 타 직종, 이전 직장에서의 경력이 워낙 좋으셨던 점장님이어서 더 넓은 관점으로 책을 관리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성실한 신입이라 서로 도우며 재미있게 일했었다. 다른 곳에서도 동료운이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C서점에서의 직장 동료운은 최고였다.
정기적으로. 파트 이동을 하면 어떨까요?
그건 좀…
살짝 답답했던 적은 있었다. 학습과 수험서, 외국어, 아동 파트를 무서워(?)하는 신입들과 본인도 이들 파트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동에 대하여 소극적이었던 점장님을 보고 있을 때의 감정이었다. 개정판과 공문을 수시로 체크해야 하고 주기적인 도서 교체가 많은 문제집류나 가짓수, 소분류가 다양한 아동 파트는 초보 신입이 맡기에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해당 업무 경험이 있는 경력자가 도와주면 못할 것도 없는데, 많이 어려워 보였던 모양이었다. 서점에서의 경력을 다양하게 쌓게 해주고 싶어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가르쳐 주기는 했으나 선 듯 마음이 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서점마다 다른 관리방식에 내 생각만 강요할 수는 없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 물들게 해 주리라, 하는 야심을 품고 슬쩍슬쩍 업무를 가르쳐 주었다.
일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업무상 힘든 일들은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고, 진상 손님들도 커버 가능한 수준이었다. 지역에 새로 들어온, 이전에는 없던 분위기 좋은 중형 서점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손님들 사이에서도 웬만하면 정착을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점장님은, 서점 업무를 떠나, 다른 부분에서도 배울 것이 많은 분이었고 어울리는 재미가 있는 신입들도 좋았다.
큐레이션 업무가 용이한 곳을 찾아오느라 통근 거리가 왕복 4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닌 곳이 C서점이었다. 매일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다녔고, 그동안 못 들었던 노래를 풀 장착 해서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을 여러 가지 노선으로 다니는 재미와 다양한 군것질로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었다. (주로 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책은 보고 싶어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버스 안에서도 책을 볼 수 있는 능력자들이 부럽다.)
자연재해에 맞닥뜨리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선택이 마주한 결과는, 개인적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일이 있어도 원거리 직장에 잘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집 식구들까지 난리가 났었다.
C서점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만났던 해, 지역에 엄청난 눈이 내렸다. 퇴근시간에 집중된 눈은 원거리를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 자연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한참 돌아가는 전철 노선은 이미 운행 중단 되어 있었다. 버스에서는 조마조마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밖만 응시했다. 내리치는 눈발에 버스의 와이퍼는 재기능을 못했고, 운전기사님은 사이드 미러를 직접 닦아가며 주행했다. 창 밖 코앞이 안보일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쌓인 눈에 오르막길을 잘 올라가지 못하는 버스를 버리고 내려 몇 정거장을 걸어가야 하나를 고민해야 했다. 중간중간 눈 때문에 가지 못하는 소형차들도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몇 시간 주행, 갈아타는 지점에서 다시 몇 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가니 새벽이었다. 다음 날 오전 출근인 것은 둘째치고 다시 그 길을 출근해야 했다.
그 해 유난히 많이 내린 눈은 내릴 때마다 출퇴근 지옥을 만들어 줬고, 업무와 상관없이 퇴사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식구들의 우려와 반대도 한 몫했다. 다른 직원들은 직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거나, 멀더라도 도로 회복 속도가 빠른 구역이라 괜찮은 편이었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넘어가는 길이 큰 도로보다 작은 도로를 이용하는 곳이 많은 노선을 이용했던 내가 시간적으로 더 많은 피해를 보았다. 사정이 이러니 눈이 아닌 경우의 재해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최대한 고려하여, 근처에서 자고 출근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파트가 많은 생활 주거지에 속해 마땅한 숙박시설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으로 이사를 하거나, 나 혼자만 독립해서 직장 주변으로 오기에는 시기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다음 해에는 그렇지 않을 보장도 없었다. 결국, 더 정들기 전에 퇴사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퇴사와 그 사유를 이야기하자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업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생겼거나, 다른 서점에서의 이직 제의 혹은 직접 서점 창업을 하기 위해서는 아닌지, 의심을 샀다. 눈 재해 관련 힘들었던 상황과 가족들의 반대등을 상세하게 이야기드린 뒤에야 떨떠름하게나마 이해를 해주는 눈치였다.
퇴사일을 정하고 인수인계 등의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본사의 대표님에게 직접 연락을 받았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신규점 오픈 계획이 있는데, 오픈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신규점 관련하여 이야기는 들었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사항이었다. 기존의 직원을 순환시키는 형태가 아니었고 오픈 시 지원도 지점이 아닌 본점에서 갈 확률이 높았으므로 현재 다니고 있는 지점과는 별개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신규 오픈 예정 지점은 집에서 가깝기는 해도 노선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신도시라 기존 지역과의 노선이 많이 생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렸다거나 다른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근처에 하루 이틀 머물만한 시설이 있었고, 여차하면 도로를 따라 걸어올 수도 있었다.(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엄두도 못 낼 거리는 아니었으므로)
일단 며칠 생각해 본다고 말씀드렸고, 이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사이 머릿속에는 재해라는 단어가 지워지고, 서점에서 해보지 못했던 업무와 도서 진열관련하여 통합 관리 권한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불이 들어왔다. 내가 생각보다 단순한 인간인 것을 알게 된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