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램펄린 위에서 높이 뛰자 호주의 광활하고 푸른 초원이 눈앞에 펼쳐진다. 곧 아래로 떨어지면 꺄르르 웃고 있는 코리와 그 가족들이 보인다. 반대쪽으로 높이 뛰자 이번엔 저 멀리 호수도 보인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라 공기에는 따듯함이 섞여 있었고, 새 소리와 함께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코리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건,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을 때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가서 파트타임 일을 구하고 싶었는데 그에 비해 내 영어 실력은 너무 부족했다. 한인 음식점이나 한인 마트 일자리를 알아보고 하루 이틀 일해보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의 일자리 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동학이라는 학부 전공을 살려 오페어(Au pair) 자리를 알아보았다. 오페어는 집에 함께 거주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을 말하는데, 내니(nanny)와 다른 점은 보수가 좀 적은 대신 그 가족과 문화를 교류하면서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페어를 하기 위해 아동학 전공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전공자인데다가 어린이집에서 보육실습까지 한 경험이 장점으로 작용할 거라 생각했다.
운이 좋게 오페어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리라는 아이의 부모를 만나 면접을 보게 됐다. 오페어 면접을 볼 땐 보통 본인의 집으로 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코리 가족은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다며 내가 잠시 머물고 있었던 멜번 시티에 와서 만나는 배려도 해주었다. 코리 엄마는 아주 어릴 때 호주로 입양된 한국인이었기에 본인과 아이가 한국어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면 좋겠다는 이유로 한국인 오페어를 원했다. 그때 마침 내가 지원했기에 며칠 후부터 바로 코리네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다른 가족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그것도 호주까지 가서 하게 됐다. 인생은 정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코리 가족은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코리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면 코리 아빠는 아이를 목욕시켰고, 코리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 체육관에 가면 코리 아빠는 그 사이 마트에 가서 장을 봐왔다. 한 사람이 일할 때 다른 가족 구성원은 놀지 않는 것,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부장제가 만연한 한국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명만 고생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협력하는 하나의 팀으로 보였다.
어느 주말, 점심을 먹은 뒤 내내 코리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외출했나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나타난 코리 아빠의 품에는 나무로 만든 유아용 주방가구가 있었다. 선반에 싱크대까지 그럴듯해 보였다. 코리 아빠는 오후 내내 차고에서 그것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사실에 괜히 내가 감동 받아 짧은 영어를 더듬거리며 “You are really good father.” 라 말했다. 코리 네 집에서 머물었던 기간 동안 서로를 배려하고 협력하는 관계 안에서는 평화롭고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이 생긴다는 걸 깨달았다.
외국 문화를 접하러 가서 다른 가족 문화까지 접하고 온 나는 그때부터 화목한 나의 팀, 나의 가족을 꾸리는 것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꿈인 임상심리학자가 되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혼은커녕 연애를 하는 것조차 멀고 먼 딴 세상 얘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연애를 안 하는 동안 소개팅을 쉰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내 관심사는 연구, 병원 수련 같은 데에만 집중되어 있다 보니 막상 소개팅에 나가도 할 얘기가 없었다. 그러니 소개팅이 잘 될 리도 만무했다. 소개팅에서 다른 업무를 하는 사람에게 일 얘기만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라.
이렇게 연애조차도 거리가 멀어지니 대학원 동기들에게 나중에 결혼을 안 하고 살고 있다면 독거마을을 만들자고 제안한 적도 있다. 서로 다른 집에서 살면서 독립된 생활을 하되, 같은 건물이나 같은 동네에 살면서 일주일에 몇 번은 같이 밥도 먹고 반찬도 나눠 먹고, 반상회처럼 만나서 수다도 떨자고 말이다. 우리 셋 뿐 아니라 주변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같이 독거 마을에 살면서 서로의 친구가 되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기 언니가 먼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까지 해버리면서 독거 마을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거마을 얘기를 할 때 동기 언니는 조금 시큰둥했고, 내가 제일 신났던 것 같기도 하다.
결혼을 늦게 할 것 같았던 다른 친구들마저도 결혼을 하고 나니 외로워져서 더 부지런히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이때는 병원 수련이 끝나고 자격을 취득한 후라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소개팅이 무난하게 잘 진행되기도 했고, 연애도 했다.
그런데 어떤 소망이 너무 크면 그것에 눈이 멀어 다른 것들을 보는 시야는 가려지기도 한다. 다른 위험 요소들을 발견하더라도 흐린 눈을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이 너무 커서인지 잘못된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에 ‘이 사람이랑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결혼을 하고 싶은데 이 사람이면 나쁘지 않겠네.’라는 마음으로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결혼식을 올린 지 두 달 만에 전남편에게 결혼을 유지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되어 이혼을 하게 됐다.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혼자 살게 됐다. 처음부터 비혼을 지향하거나 결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결혼을 꿈꿔왔었다. 하지만 혼자 살게 되니 이 생활도 꽤 괜찮다고 느낀다. 이런 1인 가구의 삶을 계속해서 잘 꾸려나가고 싶어졌다. 대학원 동기들과 얘기했던 독거 마을을 실제로는 만들진 못하겠지만, 이 책을 읽는 1인 가구 독자들과 함께 우리 마음 속에 독거마을을 만들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