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렌즈가 뿌옇게 변했다. 처음에는 빛이 밝은 곳에서만 약간 시야에 방해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렌즈 표면이 벗겨져, 빛이 밝지 않아도 앞이 뿌옇게 보였다. 안경알에 얼룩이 잔뜩 묻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진즉 안경을 바꾸러 갔을 테지만, 게으른 난 미루고 미루다 정말 안 되겠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안경점에 찾아갔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얼른 처리해버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부지런한 건지, 부럽기만 하다.
어느 안경점으로 갈까 하다가 이번에도 전에 갔던 곳으로 향했다. 안경점 사장님이 친절하기도 하고 익숙하니까 매번 가게 된다. 오랜만에 본 사장님은 내 이름을 묻고 컴퓨터에서 이전 정보들을 찾아보는 것 같더니 아는 척을 해왔다. 단골인 우리 가족 중 누군가로부터 결혼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임신한 거냐고 물었다. 예전보다 체중이 십킬로그램 정도 늘긴 했지만 임신한 것처럼 보일 정도인가 당황스러웠다. 멋쩍게 웃으며 살쪄서 그렇게 봤나보다고 임신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안경테를 고르려는데 사장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남편이 잘해줘서 살이 쪘나보네요.”
“아니요. 이혼해서 남편 없어요.”
내 답변에 안경점 사장님은 깜짝 놀라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본인 지인들도 이혼을 했는데 그래도 결국 좋은 짝을 만나서 잘 살고 있다고, 나도 다시 좋은 사람 만나면 된다고도 덧붙였다. 안경테를 고르고 시력 검진을 하는 중간 중간마다 이혼에 대한 얘기가 따라 붙었다.
“이 숫자가 뭐로 보여요?”, “요즘엔 이혼이 흠도 아닌데 뭐.”
“자 여기에 이마 대고 앞에 볼게요.”, “또 좋은 사람 만나면 되죠.”
“눈 깜박임 잠깐 멈춰볼게요.”, “나도 이혼할까 두려워서 결혼을 못했어요.”
자신이 했던 말을 어떻게든 주워 담으려는 것 같았다. 난 ‘이사 갔어요’, ‘새로운 직장에 다녀요’ 등과 같이 어떠한 사실을 언급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은 말투와 표정으로 말했을 뿐인데, 안경점 사장님은 왜 그렇게 사과와 위로를 하려했던 걸까.
한동안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내 이혼 소식을 알리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코로나 때문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가까운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만날 일이 없다보니,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서로 일상을 공유하는 빈도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난 뒤에야 오랜만에 모임에 나갈 수 있었다. 모임에선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가벼운 일상 얘기를 하고 있던 중 누군가가 내 결혼 생활을 물었다. 분위기에 맞추어서 웃으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부러 좀 밝게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다고 답하자, 물어본 사람은 적잖게 당황하며 몰랐다고, 물어봐서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에 이혼했다고 대답한 나도 덩달아 미안하게 느껴졌다.
이혼했다는 이야기는 어떤 표정과 말투로 말해야 하는 걸까? 예능에서 연예인들도 서로를 놀리듯 가볍게 이혼 얘기를 하니 나도 그 분위기에 따라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하자니 자신을 속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한동안 너무나 힘들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기에는 힘들어했던 과거의 나에게 미안하고 슬픈 일이니까. 반대로 엄숙한 분위기로 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것 또한 현재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일이다. 힘들었지만 괜찮아졌다. 죽고 싶을 만큼 우울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회복되었다. 역경을 겪으며 좀 더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너그러워지기도 했다. 이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이나 이별, 사고와 같은 일들을 시간이 지나도 가볍게 얘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혼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이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흔한 일이 되었을 지라도 가벼운 일이 될 수는 없는 일일테다. 그렇기에 난 여전히 결혼했냐는 질문에 머뭇거리게 된다.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해야 할까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