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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설 Dec 15. 2023

부족하면 뭐 어때

  한글 파일 빈 흰색 화면에 커서가 깜박인다. 한 줄, 두 줄,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이런 글은 별로인 것 같은데. 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독자들은 이런 글을 굳이 읽고 싶을까. 한 단락을 썼다가 또 지운다. 아예 다른 내용을 쓰면 좋겠어. 새로운 글을 써내려간다. 몇 문장 쓰지 않았는데 또 다시 막힌다. 웹서핑도 하고, 잠시 책상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고 와도 흰 화면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다. 


  심한 상처가 난 살이 얼마나 심하게 패였고, 피가 철철 흘렀는지 묘사하는 건 쉽지가 않다. 처음엔 피가 나기에 놀라 자세히 들여다보니 뼈 같은 흰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고. 아물어가는 과정 중에 딱지가 생겼는데 다 아물지 않은 채로 딱지가 떨어져서 또 다시 상처가 드러나기도 했다고. 이러한 묘사 없이, 다 나은 흔적만을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나 심하게 다쳤는데 이제는 이렇게 아물었어, 이거 봐봐. 라고 한 문장으로 눙치고 싶은 마음이다. 우울증에 대한 글을 쓰는 게 나한테는 그렇다. 그러나 글의 맥락상 이 주제는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커서가 깜빡이는 걸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현명하지 못해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결혼을 하고 싶다 해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현실적으로 따져봤을 거였다. 상황을 다각도로 살펴본다면 나처럼 연애도 재미가 없던 사람과 결혼하는 일 따윈 없었을 거다. 내가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 자책감과 함께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혼을 결정했던 건 상대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혼 전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전 남편 스스로도 그게 문제고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 내가 발견했다. 꽁꽁 숨긴 비밀이 결혼 후에야 드러났고, 전 남편 때문에 결혼 생활이 파탄 났다. 결혼식을 올린지 두 달이 지났고, 혼인신고를 한지 막 한 달 쯤 됐을 시점이었다. 상대의 잘못 때문이었는데도 왜 내가 이런 인간을 결혼상대로 택했나 싶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명색이 심리전문가라는 사람이 이렇게 멍청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우리 모두 현명하지 못해 사느라 고생하니까, 고생한 나에게 맛있는 것도 먹여주고, 좋은 거 보여줍시다.”

  그날 교육 분석을 마치며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심리상담가도 그렇지 못할 때가 있구나 싶었다. 내가 평소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니, 그들 또한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난 뒤 그것을 복구해가며 사는 것 같았다. 나만 부족한 게 아닐 수 있겠단 생각에 안도가 됐다.   

  우울증에 빠지면 자책하고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상대나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을 책망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화살촉이 나에게 향해있어서 스스로를 공격한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이 정말 사실이 맞는지, 주변 상황이나 상대의 잘못과 책임은 없는지 다시 한 번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 또한 우울증에 빠져있을 때, 실제보다 과하게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부족한 면이 있으며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수를 해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회하면 된다. 만약 복구하지 못하는 실수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된다. 사람이라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힘이 드는데, 거기에 굳이 자책까지 하면서 나를 더 괴롭힐 필요는 없는 일이다.   


  현명한 사람이란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자신에게 벌어진 어려움을 수용하고, 그 속에서도 더 나아지기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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