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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설 Dec 22. 2023

남편과 자식은 없어도


  변했지만, 중요한 건 변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루겠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내 삶을 잘 살아갈 의무가 있었다. 이혼 후에도 나에게는 살아갈 나날들이 있으니까. 나를 염려해주는 가족과 친구들, 지인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나였다. 



  집에 일이 생겨 한 달 간 심리상담을 하기 어렵다고 내담자들에게 알렸다. 한 달 동안 상담소 문을 닫았다. 닫고 쉬는 동안 내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에 잠을 깨면 부정적인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오기 전, 누운 상태에서 머리맡에 손을 뻗어 핸드폰으로 음악을 튼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다가 핸드폰 옆에 둔 룸 스프레이를 뿌려 좋은 향기를 맡는다. 귓가와 코끝에 기분 좋은 감각이 충분히 들어오고 부드러운 촉감의 이불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대고 나면 그나마 이부자리에서 일어날 마음이 생겼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고 나갈 일은 없어도 매일 샤워는 했다. 하루에 두 끼는 꼭 챙겨먹었다. 밥을 차리고, 먹고, 치우고, 쇼파에 앉거나 누워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또 식사시간이 됐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훌쩍 흘러갔다. 가끔 집을 나설 때마다 집밖의 풍경이 달라져있었다.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던 거다.  


  힘들고 지친 마음으로 상담소를 찾아온 내담자를 나 또한 힘든 마음으로 대할 수 없어서 상담을 쉬기로 했지만, 미안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상담이 진행되는데 한 달 동안이나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상담자를 찾아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고, 섭섭하거나 속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도 대다수의 내담자들은 한 달 후로 예약을 다시 잡았다. 나를 기다리는 내담자들을 위해서라도 한 달 내에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회복해야 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약속된 한 달이 지나 다시 상담소 문을 열었다. 내담자들은 비타민제나 꽃다발, 케이크 같은 작은 선물을 건넸다.  

  “오랜만에 오니까 그냥 사오고 싶었어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는 괜찮은지를 구태여 묻지 않았다. 따스한 온기만을 건넬 뿐이었다. 심리상담은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상담자도 내담자로부터, 또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위로받기도 한다. 내담자들이 주는 위로를 느끼고 나니, 나도 다시 그들을 위해, 부족한 나를 기다려준 그들을 위해서 온 마음 다해 심리상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한 달을 쉬고 돌아오니 마음이 다 회복된 건 아니었어도, 상담 시간만큼은 다른 잡생각 없이 그들의 어려움에 집중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을 함께 파헤쳐 무엇 때문에 어려움이 발생했는지 살펴보고, 변화해나가는 과정이 기쁘고도 뿌듯했다. 힘들었던 내가 여전히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효능감을 느꼈다. 상담자인 내가 그들에게 하는 얘기를 내 귀로도 들으며 나 또한 위로받기도 했다. 

 



  화분에 심어둔 식물들은 변화가 없어보여도 어느새 보면 자라나 있었다. 제라늄은 꽃이 시들기 시작하면 금세 다른 줄기에서 새로운 꽃망울을 맺었다. 여인초는 말 그대로 쑥쑥 자라서 내 키 만큼 커졌다. 햇빛이 잘 비추는 집안 창가에 두고 흙이 마를 때 쯤 물을 주고, 하루에 한두 번 환기를 시킨 게 다 인데 식물들은 자라났다. 내가 이 악물고 애쓰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아도 식물들은 생명력을 뽐내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이러한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살만한 이유는 충분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 잎이 돋아나서 연두 빛을 발하고, 이내 진한 초록색으로 변했다가, 가을이 되면 노랗고 빨갛게 물드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 년을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깔깔대는 무해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따뜻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듯 했다. 가까운 사람들과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말 할 것도 없이 소중했다.  


  사람들과 자연이 주는 위로에 힘입어 살아보기로 했다. 무언가가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순간엔 더 잘 살아보고 싶은 의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물론 그 의욕이 꺾여서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반복했지만 말이다. 



  인생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변했지만, 나에게 중요한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루겠다는 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협력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남편과 자식은 없지만, 자꾸만 마음을 쓰고 싶은 사람들과 생명체는 더 늘어났다. 

  나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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